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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Jun 15. 2017

스물둘 청년의 뜨거웠던 사랑과 신념 <박열>

박열·후미코 로맨스는 합격점…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성찰은 '밋밋'

1923년 일본 도쿄, 조선인 청년 박열(이제훈 분)은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 조직 '불령사'를 이끌며 일제 치하 조선의 독립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관동 대지진이 발생해 치안이 마비되고, 일본 내각은 상황을 통제하고자 "조선인들이 혼란을 틈타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다. 이 때문에 6000여 명에 달하는 재일 조선인이 일본 자경단과 군대에 의해 무분별하게 학살당하고 박열 또한 연인이자 동지인 일본인 후미코(최희서 분)과 함께 경찰에 체포된다. 일본 내무대신 미즈노(김인우 분)는 불안정한 정국을 수습하고자 박열에게 황태자 암살 기도 혐의를 덧씌우고, 박열과 후미코는 되레 "천황은 없어져야 한다"고 대역죄인을 자처하며 재판을 받아들인다.


영화 <박열>은 국내에서는 생소한 재일 독립운동가 박열(1902~1974)의 뜨거웠던 청춘을 다룬 작품이다. 스물두 살 청년 박열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으로 조선 독립을 이루고자 했던 그의 꿈을 재조명하고, 여기에 연인 후미코와의 관계를 통해 사랑 앞에 선 이들의 거칠 것 없이 순수한 열정을 그린다. 이념과 체제, 국가를 초월한 두 남녀의 서사는 역사극이기에 앞서 이미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인 로맨스이기도 하다.

박열과 후미코 간의 남다른 신뢰와 애정은 영화의 굵직한 줄기다. 같은 형무소에 수감된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고 간간히 만나며 사랑을 이어가는 전개는 어이없을 만큼 당당하고 천진난만한 태도 덕에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내내 유쾌한 웃음을 자아낸다. 기꺼이 대역 죄인이 되어 함께 사형을 받겠노라 외치는 이들에게 형무소는 새로운 '동거' 공간이고, 심지어 죽음조차도 함께해 두려울 것 없는 '동행'이다. 자신들을 심문하는 검사에게 부탁해 함께 사진을 찍고, 각각 조선 관복과 치마저고리를 입고 출두해 재판정을 혼례식으로 만드는 에피소드들은 특히 인상적이다. 중간중간 서로 코를 찡긋하는 둘만의 인사는 여느 청춘 커플의 싱그러움과도 다를 바 없다.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가 권력에 저항하고 자유를 부르짖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과 맞물리는 지점은 의미심장하다. 특히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려진 뒤 조선에서 친할머니 집 식모살이를 한 후미코의 과거는 박열을 향한 그의 애정을 효과적으로 뒷받침한다. "3.1 운동이 남의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는 그의 회상은 권력에 대한 약자의 분노, 나아가 제국주의에 맞선 시민의식의 성장으로까지 비친다. 가족이 없는 후미코와 혼인신고를 한 박열이 "사형 후 시신을 조선의 고향에 함께 묻어달라"고 말하고, "함께 찍은 사진을 조선의 어머니에게 보내겠다"고 약속하는 에피소드들은 든든한 박열을 그의 든든한 연인이자 일종의 '구원자'로까지 위치시킨다.

다만 박열과 후미코의 로맨스를 중심에 두면서도 곳곳에 곁다리를 걸친 영화의 서사는 다소 산만하게 느껴지는 감이 없지 않다. 특히 영화 초반부 관동 대지진 이후 벌어지는 조선인 학살 시퀀스는 단편적으로만 다뤄져 못내 찝찝하게 남는다. 지진 이후 일본 민중 사이에 퍼진 광기, 일본 내각이 처한 당시의 딜레마, 일본 제국주의와 천황제의 폐해 등을 도마에 올려놓고도 이에 대해 깊은 성찰을 제시하는 데에 실패한 점 또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박열>이 역사적 사건과 괄호로 남은 로맨스 사이에서 좀처럼 중심을 잡지 못한 걸로 여겨지는 이유다. 2017년 6월 28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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