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여성에게 '처녀'이길 요구하는가 <졸업반>

'순정'으로 포장된 미성숙한 남성성의 폭력

by 오늘
그 어떤 신비로운 가능성도 희망도 찾지 못해 방황하던 청년들은 쫓기듯 어학연수를 떠나고
꿈에서 아직 덜 깬 아이들은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날 듯 짝짓기에 몰두했지 (브로콜리너마저 '졸업')

요즘 대학가에서 '졸업'이란 단어가 갖는 뉘앙스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넘어서야 할 관문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언제까지고 '유예'하고 싶은 일종의 숙제다. 그래서 많은 청춘들은 크게 두 종류의 선택을 한다. 성공을 위해 앞만 보고 내달리는 '어른'이 되거나, 아니면 아직 꿈에서 깨지 않은 사춘기 소년·소녀로 남거나 말이다.


애니메이션 영화 <졸업반> 속 주인공 정우의 경우는 후자다. 미대 졸업반인 그는 과에서 '얼음공주'로 통하는 동급생 주희를 남몰래 흠모한다. 정작 주희와 대화조차 한 적 없지만, 그녀를 볼 때마다 설레고, 그 마음을 담은 웹툰까지 그려 연재하고 있다. 이런 정우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진다. 우연한 계기로 룸살롱에서 일하고 있는 주희와 마주친 것이다. 주희는 정우에게 비밀 유지를 당부하고, 정우는 비밀을 지키겠노라 약속한다. 그렇게 둘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순정을 바쳐 짝사랑해 온 여자가 실은 '룸녀'로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안 정우의 마음은 뒤죽박죽이다. 학교생활에 충실하면서 프랑스 유학 학비를 모으기 위해 룸살롱에서 일하는 주희의 생활을 "나름대로 열심히 사는 것"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왠지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다. 단둘만의 비밀을 공유하면서 그녀에게 특별한 남자가 된 것만 같고, 그녀의 상처를 자신이 위로해 줄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든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불편해지는 건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다. 주희를 향한 정우의 동경이 어느새 소유욕으로, 그리고 독점욕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특히 영화 중반 이후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정우의 '신성한' 임무가 친구 동화로 인해 침해당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은 날카롭게 폐부를 찌른다. 베일에 싸인 동화와 주희의 관계, 재적 위기에 처한 주희가 학과 교수와 맺는 모종의 거래는 정우의 시선을 통해 철저하게 악으로 규정된다. 그리고 이는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서연(배수지 분)이 만취한 채 남자 선배 재욱(유연석 분)의 집에 들어가는 걸 본 주인공 승민(이제훈 분)의 모습과도 꼭 닮았다.


결국 <졸업반>은 남성의 눈을 통해 여성을 투영의 대상으로 대하면서 되레 '한남충'으로 대변되는 못난 남성성을 넌지시 비꼬는 작품이다. 성매매 여성을 비하하면서도 그 시장의 충실한 소비자로서 복무하는 남성을 비판하고, 여성의 약점을 이용해 그 위에서 강자로 군림하려는 남성을 비판한다. 이들의 추악한 민낯이 애니메이션을 통해 더욱 극단적으로 묘사된 이 영화를 보면서, 아마 많은 여성 관객들은 피가 거꾸로 솟을 것이다. 어떤 남성 관객들은 주희를 '쌍년'이라고 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관객이 어느새 정우처럼 멋대로 주희에게 처녀성을 투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얘기는 달라진다. "네가 내 남자친구야?"라고 묻는 주희의 일갈에 정우는 할 말이 없고, 주희를 향한 그의 진심은 주희에게(실질적으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힘든 현실 속에서도 한 발짝씩 나아가는 주희의 세계는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는 정우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르다. 주희가 '여신'도 '처녀'도 아닌 그저 한 사람이자, 특별한 누군가의 '구원' 따위에 의지하지 않는 독립된 개인이라는 사실. 영화 말미 이를 받아들이고 씁쓸한 표정으로 '주희를 졸업하는' 정우의 모습은 여전히 굳건한 가부장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 나라 뭇 남성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12월 중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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