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늘 Jan 10. 2017

타인의 '공백'을 만난다는 것 <단지 세상의 끝>

12년만의 재회 속 집안 가득 채워진 다섯 감정의 밀도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정현종 시(時) <방문객>


서른넷 청년 루이(가스파르 울리엘 분)는 고향을 떠난 지 12년 만에 집을 향한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아 곧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가족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게이이자 성공한 작가인 그를 맞아 가족들은 화려한 식사 자리를 준비하고 자신을 꾸미기에 분주하다. 어머니(나탈리 베이 분)와 형 앙투안(뱅상 카셀 분), 여동생 쉬잔(레아 세이두 분), 그리고 처음 만나는 형수 카트린(마리옹 꼬띠아르 분)까지. 네 사람은 루이를 환대하면서도 미묘하게 날을 세우고, 루이는 이들과 한나절을 보내며 자신의 죽음을 털어놓을 기회를 엿본다.

12년 만에 가족과 재회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영화 <단지 세상의 끝>이 오랜 세월 가족을 떠나 있던 루이를 돌연 가족 앞에 내세우면서 던지는 질문이다. 이후 루이는 여동생의 방을 구경하고 형수에게 조카 이야기를 듣는다. 온 가족과 어머니가 차려준 점심 식사를 마친 뒤에는 형과 함께 차를 타고 담배를 사러 나선다. 돌아와서는 또 다 같이 디저트를 먹는다. 그 사이 수많은 말들이 오간다. 서로가 웃고 울고 화내고 싸우는데 그게 왜인지는 좀처럼 속시원히 드러나는 법이 없다. 그렇게 말미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가족의 재회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도 답을 내리지도 않는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흐릿하지만 강렬하게 자리한 인물들의 감정선을 추적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정보를 철저하게 제한하고 감정을 부각하는 영화의 태도가 큰 몫을 한다. 루이가 과거 집을 떠난 계기나 그동안 겪어온 삶, 그리고 형수 카트린과 형 앙투안, 어머니와 쉬잔, 쉬잔과 앙투안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갈등까지. 루이와 네 가족 사이에 자리한 12년의 공백 앞에서 이들은 너무나도 할 말이 많은 동시에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반가움과 애증, 동경, 원망, 멸시, 열등감… 관계마다 각각 다른 결로 뒤섞인 감정들은 어떤 이유도 목적도 드러내지 않은 채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이는 스크린 밖 관객에게도 각자 채워야 할 공백이 된다.

실내 로케이션과 클로즈업 샷으로 대표되는 특유의 연출은 인물들의 감정을 오롯이 담아내는 데 주효하다. 특히 영화 초반부 집 안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짝 비추는 시퀀스는 처음 대면한 루이와 가족들 사이의 긴장감을 더할 나위 없이 절묘하게 포착한다. 이 밖에도 루이를 통해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인물들의 감정은 줄곧 닫힌 공간 속에서 터질 듯 높은 밀도로 관객을 압도한다. 이는 일견 아이들 간의 싸움으로 한 거실에 모인 부부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대학살의 신>(2011)을 연상시키는 지점이기도 하다.


<단지 세상의 끝>은 <로렌스 애니웨이>(2012)로 국내에서도 유명한 스물여덟 살의 캐나다 출신 영화감독 자비에 돌란이 메가폰을 잡은 작품이다. 극작가 장 뤽 라갸르스의 동명 희곡을 모티브로 지문 없이 대사로만 이루어진 원작을 스크린에 옮겨냈다. 지난해 제69회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 등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2017년 1월 19일 개봉.

매거진의 이전글 헤어날 곳 없는 어떤 가장의 하루 <소시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