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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Jan 10. 2017

헤어날 곳 없는 어떤 가장의 하루 <소시민>

'먹고사니즘'에 빠진 이 시대 직장인의 초현실적 자화상

한 가정의 가장인 재필(한성천 분)은 평범한 소시민이자 '소심인'이다.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와 자신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직장 상사 앞에서 제대로 변명조차 하지 못하고 쩔쩔매기 일쑤다. 비굴하고도 비루한 생활 속에서 그의 목표는 오직 하나. 직장에서 안 잘리고 월급 받으며 어린 딸을 남부럽지 않게 키워내는 것이다. 이런 재필은 어느 날 귀가 후 집안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아내를 발견한다. 깜짝 놀란 그는 경찰 지구대로 달려가 신고하지만, 오히려 용의자로 의심받아 붙잡히고, 상사가 시킨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도망쳐 쫓기는 신세가 된다.


영화 <소시민>은 가장으로서의 무게에 짓눌린 한 남자의 이야기를 '웃프게' 그린 작품이다. 남편이자 아빠, 한편으로는 오빠이자 아들인 재필은 지금 이 나라를 살아가는 마흔 즈음 기혼 남성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영화는 일요일 하루 동안 이런저런 문제에 부딪히는 재필을 뒤따르며 도통 헤어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 그의 고군분투를 세심하게 담아낸다.

모텔 방에서 동반 자살을 기도하는 한 부부의 에피소드를 시작으로 퍼져 나가는 영화 속 재필의 서사는 그야말로 막무가내다. 일요일인데도 상사의 부름을 받아 출근한 그는 알지도 못하는 살인사건 때문에 경찰 조사를 받고, 이 때문에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지 못한다. 겨우 풀려나선 한숨 돌릴 새도 없이 일거리를 떠안는데, 이 와중에 별거 중인 아내가 전화를 걸어와 당장 이혼하자고 자신을 몰아세운다. 여기에 여동생 재숙(황보라 분)까지 적지 않은 돈을 빌려달라며 속을 썩인다. 그다음 재필은 아내를 죽인 살인 용의자가 되고, 또 그다음엔 경찰에 쫓기는 도망자 신세가 된다.


이렇게 당위도 논리도 모자란 채 억지스레 흘러가는 플롯은 개연성도 설득력도 빈약하기 이를 데 없지만, 역설적이게도 영화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재필 앞에 쏟아져 내리는 부당한 상황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과장된 현실이 어느새 '초현실'의 영역까지 다다른다는 점에서다. 지나치게 영화적이다 못해 아예 연극적으로 느껴지는 에피소드들은 그 어떤 직장인의 일상보다 바쁜 재필의 일요일을 일종의 재난처럼 비춘다. 그렇게 <소시민>은 고요한 수면 아래 지리멸렬한 생활을 겪어내는 이름 없는 '직장인'들의 현주소를 효과적으로 전시하는 데 성공한다.

재필이 백수 덕진(김상균 분), 술집 종업원 명은(홍이주 분)을 만난 뒤 겪는 모험은 이 영화의 정점이다. 지구대 경찰들을 피해 추격전을 벌이는 세 사람의 모습은 일견 사회적 약자로 구성된 자경 세력으로도 비치고, 이들이 서로 맞닿는 목표를 향해 도심을 누비는 장면들에선 로드무비적 면모까지 엿보인다. 이 와중에 영화가 줄곧 희화적으로 다루는 경찰들은 냉정하면서도 무책임한 공권력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그런데도 말미에 이르기까지 좀처럼 통쾌함을 허용하지 않는 영화의 태도는 못내 불편하다. 자신을 붙잡아둔 경찰에게 "내가 회사에서 잘리면 책임질 거냐"고 따져 묻는 재필은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고, 영화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기계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자조를 가족애로 애써 위로할 뿐이다. 평생 일밖에 모른 채 살아온 부모 세대와 다르지 않게 '먹고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개인의 숙명. 한 '소시민'의 하룻밤 해프닝을 통해 <소시민>이 남기는 씁쓸한 메시지다. 2017년 1월 12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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