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해낼 수 있는 재현(再現)이라는 이름의 마법
일상은 길고 어두컴컴한 터널과 다름없다. 반복적이며 익숙하고 지루하다. 뻔하고 흔한 이 길을 한참 달려야 겨우 아주 가끔씩 특별한 순간이 눈 앞에 펼쳐진다. 말하자면 일상은 ‘해프닝’이란 역에 도달하기 위해 감내해야 할 재미없는 여행 같은 것이다. 달리 대체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소중할 것도 없는 시간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도 쭈욱 겪어갈 일상은 은연중에 우리가 늘 마시는 산소처럼 아무것도 아니다.
영화 <녹화중이야> 속 스물셋 연희(김혜연 분)의 경우는 좀 다르다. 위암 4기 시한부 인생인 그는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를 소중히 기록한다. 남자친구 민철(최현우 분)을 찾아가 잠자는 그를 깨우고, 함께 산에 오르고, 공원 데이트를 하는 등의 일상을 캠코더에 담는다. 민철의 친구 우석(서진원 분)과 형 석민(박상규 분)도 심심찮게 등장해 이들과 함께한다. 특별히 무언가를 ‘포착’하려는 건 아니다. 그저 익숙한 곳에 가고 뻔한 사람을 만나는 일상이 뷰파인더에 담길 뿐이다. 눈에 걸리는 모든 사소한 일들을 캠코더로 기록한다. 더 정확하게는, 모든 일상의 순간 속에서 캠코더는 늘 녹화중이다.
서사의 중심은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연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을 지키는 민철의 이야기다. 컴퓨터 수리기사 일을 하던 민철은 우연히 출장 온 집에서 은희를 만난 인연으로 연인으로 발전한다. 거듭된 암 투병에도 씩씩하고 밝은 연희는 민철과 알콩달콩 행복한 시간들을 보낸다. 민철의 죽마고우 우석은 연희가 찍은 영상을 영화로 만들기로 하고, 민철의 형 석민은 의사로서 연희의 투병을 돕는다.
다분히 신파적인 설정을 일상적으로 풀어낸 영화의 만듦새는 묘하게 매력적이다. 극 중 인물들이 서로 카메라를 주고받으며 ‘시선’과 ‘피사체’의 입장을 오가는 지점은 특히 그렇다. 연희와 민철을 중심으로 형성된 네 인물 간의 관계는 시시각각 주객을 전도시키며 사적 다큐멘터리를 겹겹이 쌓아 올린다. 완전히 독립된 이 세계는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책상 서랍 속에 숨겨진 먼지 쌓인 비디오테이프나 비밀 일기장, 혹은 연애편지와도 닮았다.
등장인물들의 손을 오가며 핸드 헬드 숏으로 촬영된 장면 장면들에서는 현장감이 다분하다. 여기에 클로즈 업 숏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물 간의 어쭙잖은 인터뷰는 역설적이게도 주체와 객체의 내면을 더할 나위 없이 깊은 결로 담아낸다. 이들의 (대사가 아닌)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그 시공간 속에 함께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돌연 슬퍼진다. ‘아, 이건 이미 없는 과거의 일이구나’ 하는 생각에서다. 이 와중에 고개를 드는 괴리감과 상실감은 퍽 아릿하다.
결국 <녹화중이야>는 재현(再現)을 위해 온 힘을 쥐어짠 끝에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고(故) 최연희 양의 유언대로 이 영상을 공개하는 바입니다”라고, 연희의 죽음을 전제한 뒤 시작되는 영화는 그의 존재를 통해 부재를 상기시킨다. 기록된 사건들이 파편화된 시간 속에 재구성되어 추억으로 소환된다. 각각 연희이기도 하고 남은 이들이기도 한 ‘그때의 나’와 ‘그때의 당신’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렇게 영화는 감정을, 관계를, 삶을 재현하며 과거를 현재 속에 되살린다. 시간을 다루는 세상 모든 예술의 사명이 그러하듯 말이다. 2017년 3월 2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