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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기형 Jan 22. 2022

창백한 푸른 점 속 나와 너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에서 발견한 문장과 시선

여기, 삶에 대한 기쁨과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책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를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표현했던 과학자 칼 세이건의 딸인 샤샤 세이건이 쓴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입니다. 


“삶을 긍정하세요.”라는 구호만으로 가득한 자기 계발서 100권 읽는 것보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신의 삶을 투영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런 책 1권 읽는 게 훨씬 값진 일 일거예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과학적 사고와 문학을 전공한 저자의 인문학적 시선이 만난 경우라면 더더욱.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 속에서 ‘태어남-성년-결혼-죽음’이라는 삶의 시간이 흐르고, 일상 속에서 함께하는 여러 ‘의식’들이 얼마나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지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어요. 먼 우주에서 바라본다면 인간은 하나의 점에 불과하겠지만, 그 점들이 모여서 사랑을 하고 가족을 이루고 공동체를 형성하여 다양한 일상을 함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사라는 경직된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지요. 지금의 회사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어느 누구와 공동체를 이루고 어떤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 궁금해지는 하루네요. 


http://www.yes24.com/Product/Goods/101988756




1. 아버지가 나에게 가르쳐준 모든 것, 아버지가 지지하는 모든 것이 내가 다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으리라고 믿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우리 집은, 종교는 없어도 결코 냉소적이지는 않았다. 부모님은 내가 살아 있음을 너무나 아름답고, 아찔할 정도로 신비롭고, 우연히 일어난 신성한 기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부모님은 우주는 막대하고 우리 인간은 궁벽한 곳에 있는 작은 행성에서 눈 한 번 깜박할 순간 동안을 살아가는 아주 작은 존재라고 했다. 또 두 분의 책에도 나오지만 "우리처럼 작은 존재가 이 광대함을 견디는 방법은 오직 사랑뿐이다"라는 말도 나에게 들려주었다. 


2. 지구 상에서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존재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의식이 만들어졌다.


3.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날 때, 새로운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몸 안에 생겨 날 때, 격한 감정과 함께 우리는 삶이라는 막대한 경이의 일부를 경험한다.


4. 이게 얼마나 경탄스러운 일인지 잊기 쉽다. 하루하루가 흘러가고 일상이 반복되다 보면 그게 얼마나 기적적인 일인지는 쉽게 잊힌다. 그렇지만 살아 있다는 사실을 통렬하게 느끼는 순간이 있다. 자동차 사고를 극적으로 피했다든가 하는 무시무시한 순간일 수도 있고, 갓난아기를 품에 안을 때 같은 아름다운 순간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사이의 고요한 순간이 있다. 이 모든 기쁨과 슬픔이 오직 나 자신에게만 절실하게 느껴지는 순간들


5. 이렇게 해서 나는 우주가 현재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설 정도로 크고, 우리는 우리가 살기에 딱 적당하게 완벽히 맞춰진 행성에 살고 있으며, 우리는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어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등의 놀라운 사실을 아찔하고 충격적으로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소행성이 지구를 간발의 차로 비껴갔다면 공룡이 살아남았을 수도 있고 백악기의 조그만 포유류들이 번성해서 인간으로 진화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일이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종교적인 의미와는 다른 의미에서.


6. 그렇지만 아기가 태어나기까지 어느 지점에서 무언가 다른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우리 각자가, 살아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되기까지, 우리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도달하기까지 있었던 그 모든 일에 대해 나는 경이를 느낀다.


7. 나는 딸아이가 좀 자란 뒤에 세계의 역사와 예술과 그 안의 존재들과 그들 삶의 방식, 우주에 관한 탐구를 노란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순간에 끝내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을 품는다. 방과 후에, 주말에, 여름방학 때도 아이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무언가를 알아내는 일을 집에서 날마다 수행하는 성스러운 의식으로 여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렇게 수많은 답을 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가 아는 것은 너무나 적다는 사실을 아이가 편안하게 받아들이게끔 되지 않을까. 결국 우리의 취약함이 우리가 무언가 더 깊은 것에 다가갈 수 있게 해 준다. 사랑도 그렇고, 오류를 기꺼이 인정한다면, 예측이나 선입견을 과감히 놓아버릴 수 있다면,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에 다가갈 수 있다.


8. 영영 답을 얻을 수 없는 비밀도 있다. 우리는 아마 살아생전 빅뱅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인류가 결국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얻을 수 있는 답도 있다. 지금, 아버지와 마주하는 내가 옛날에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안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가 올 때까지는,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하루 안에도 배우고 축하할 것이 너무나 많다.


9. 그러나 신부님에게만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수했음을 깨닫고 인정하고 수습을 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같은 실수를 다시 저지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성장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의식화된 절차를 거치건 아니건 다르지 않다. 자신을 개선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추상적으로만 좋은 일이 아니고 진화상 막대한 이득이 되는 행위다. 이 식물에 독이 있다든가 이 강 아래쪽에는 급류가 흐른다 따위를 학습하지 못하면 죽을 수 있다. 같은 공동체에 속한 다른 사람 들과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또한 위험을 불러올 수 있다. 사람은 항상 자기 방식의 오류를 알아내고 더 나아지려고 애써야 한다. 이것이, 다르게 쓰이는 더 나아지다는 말의 본질이다.


10. 오류 수정이야말로 과학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틀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성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은 오류를 범했다. 과학과 종교의 결정적 차이는, 나보다 앞에 왔던 사람들, 내가 그 어깨를 디디고 서는 선각자들, 내가 아는 모든 것을 가르쳐준 사람(교사, 영웅, 멘토)의 생각이 옳지 않음을 입증하면 좋은 과학자가 된다는 점이다. 그러면 과학자는 자기 할 일을 한 것이다. 그러나 좋은 목사, 랍비, 성직자, 수도사는 반대로 전통을 고수하는 이다.


11. 아버지는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과학자는 종종 '그거 아주 좋은 논증입니다. 내 생각이 틀렸습니다'라고 말하고 자기 생각을 수정하고 다시는 이전 생각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과학에서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사실 이런 일이 지금보다 더 많아야 한다. 하지만 과학자도 인간이라 변화를 겪어내기가 고통스러울 때가 있다."


12. 반대로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자동으로, 불수의 운동으로 숨 쉬는 공기가 예수나 무함마드나 클레오파트라가 숨쉬었던 옛 공기일 뿐 이날, 새로운 미래 세대가 마실 공기인 것이다. 비단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지구를 완전히 망가뜨리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가 마시는 공기가 아직 진화하지 않아 생기지 않은 생명체의 숨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새로운 존재의 숨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먼 미래이자 누군가의 오래된 과거이니까.


13. 언젠가 딸아이가 크면 우리는 한여름에, 어쩌면 하짓날에 집 밖으로 나가 어딘가 오래전부터 있었던 아름다운 곳으로 갈 것이다. 아니면 그냥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볼 수도 있다. 그다음 현대적이고 새로운 것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도록 가릴 방법을 찾아내는 거다. 손으로 터널 모양을 만들어 그 틈으로 보면서 이 광경을 처음으로 바라본 최초의 인간은  어떤 심경이었을까 상상해볼 것이다. 우리가 지금 보는 빛이 아주 먼 옛날에 멀리에 있는 별을 떠났을 때는 이 세상이 어떠했을까를 상상해본다. 그때 여기에 생명이 있었을까? 다른 별자리를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었을까? 우리는 같이 시간여행을 하면서 그 사람들의 허파에 들어갔을지 모르는 공기 분자를 들이마셨다가 다시 그것을 세상에 내어놓을 것이다.


14. 하지만 아버지는 실제로 존재했다. 샘 할아버지도 마찬가지고. 아버지나 샘 할아버지도 어릴 때 당신들은 만나본 적이 없는 죽은 친척의 이야기를 그를 알고 사랑했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시간의 지평을 넘어 언어의 시작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적어도 과거 시제를 가능하게 한 문법이 생겨났을 때부터 그런 일이 죽 반복되었을 것이다. 그전에는 아마 전달할 수 없는 그리움, 원시적 형태의 애도, 아직 인간이 아닌 존재들 사이에서 말로 전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느낄 수 있는 무언가 있었으리라고 짐작한다.


15. 우주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든 우리가 태어났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기쁨을 느낄 것이고 고통을 느낄 것이고 거대하고도 광활한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로서의 존재를 다양하게 경험할 것이다.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건 간에, 우리는 여기에 있었다. 각각의 삶의 기록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잊힐지라도 우리가 여기에 있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우리는 살았다. 우리는 이 거대함의 일부였다. 살아 있음의 모든 위대함과 끔찍함, 숭고한 아름다움과 충격적 비통함, 단조로움, 내면의 생각, 함께 나누는 고통과 기쁨. 모든 게 정말로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광대함 속에서 노란 별 주위를 도는 우리 작은 세상 위에 있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축하하고도 남을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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