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언트와의 미팅에서 고통받는 디자이너에게
이 글은 '팩션(Fact+Fiction)'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디자인은 취향이죠, 하하. 대표님 끌리는 대로 고르시면 됩니다”
대표가 클라이언트 앞에 시안을 펼쳐 놓으며 말을 내뱉었다. 그 얘기를 들은 새로 들어온 팀장은 귀를 의심했고, 옆 자리 디자이너는 눈을 질끈 감았다. 팀장은 적잖이 당황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대표의 말을 반박하고 나서기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해 말을 삼켰다. 대표는 디자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디자이너는 아니었다. 그는 ‘디자인은 결국 개인 취향대로 결정하면 된다’는 말을 미팅 때 윤활유처럼 자주 활용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기도 했다
“음, 제 취향엔 이 쪽 시안이네요. 이걸로 하고 싶어요”
“그렇게 가시죠. 디자인은 결국 취향이니까요.”
“제가 디자인은 잘 몰라서요, 제안 주신 방향 중에 어떤 시안을 선택하는 게 좋을까요?”
“디자인은 결국 취향이니까요. 그냥 끌리는 대로 고르시면 됩니다.”
내 돈 주고 만드는 거니 내 마음대로 고르고 싶다고 말하는 클라이언트 앞에서도, 자신이 디자인에 대해 잘 모르니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하겠다는 클라이언트 앞에서도 이 표현은 유용했다. 팀장에게는 이 말이 대표 스스로의 무지함을 그럴듯하게 숨기는 것과 동시에, 디자인 업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도 없는 표현이라 생각했다. 팀장 역시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길을 택했다 : 얼마 못 가 그 회사를 도망치듯 떠났다.
‘디자인은 취향이다’는 손쉬운 회피
실제로 디자이너는 이 표현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대개는 저 일화 속 대표와 클라이언트처럼 자신이 디자인에 대한 의견을 내야 하는 입장이지만 고민은 부재함을 숨기고 싶을 때 급히들 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에 뭐라 대응해야 할지 모르는 디자이너들 역시 많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포기하는 마음으로 굴복하거나, ‘내 취향엔 그쪽이 아니고 이 쪽’이라는 말을 겨우 반론으로 꺼내어 보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내 취향과 네 취향 중 뭐가 더 낫냐의 부질없는 겨루기가 되어 버린다. 디자인 미팅이 이렇게 끝나버리는 경험은 모두에게 ‘역시 디자인은 취향대로 결정하는 문제인 건가’라는 인식만 남기게 된다.
그렇다면 정말 디자인은 취향의 문제가 아닌가?
디자인에 취향이 전혀 필요 없다거나 그 누구의 취향도 아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디자인은 ‘당신의' 취향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쉽게 접근해 보자. 디자인의 사전적 정의를 네이버에게 물어보면, ‘주어진 목적을 조형적으로 실체화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디자인을 결정하는 건 이 디자인 프로젝트의 ‘주어진 목적’ 이 무엇인가를 봐야 하는 것이다.
그 목적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새로운 브랜드를 론칭하는 중이라면, 우리 브랜드가 타겟하는 소비자가 어떤 사람이고, 그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이야기되고 싶은가가 중요하다. 우리에게 맞는 이미지와 그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미지의 교집합은 무엇이고, 다른 브랜드와 비교했을 때 어떤 점을 차별화시킬지, 때로는 비슷해 보이고 싶은지도 중요하다. 못 보던 느낌으로 굉장히 트렌디한 느낌을 주고 싶은지, 또는 안전하고 무난한 이미지가 가장 중요한지도 전략에 따라 다 달라질 수 있다. 나아가 이 제품/브랜드의 경쟁 환경은 어떠한지 그래서 때로는 디자인이 미학적인 부분이 중요한지, 그보다는 원가 절감과 메시지 후킹이 더 중요한지도 자연스레 결정할 수 있게 된다.
전략으로 설득하면 오히려 디자이너의 영역을 존중받는다
시안을 들고 갈 때마다 '디자인 하나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피드백에 괴롭다고 생각했다면 디자인에 전략을 담아보자. ‘타겟팅’과 ‘포지셔닝’ 전략이 마케팅에만 있지 않다. 최종 후보 시안을 고를 때, 눈에 보이는 미감의 차이를 둘 것이 아니라 전략적인 차이를 두라. 대부분의 클라이언트(의사결정자)들이 이러쿵저러쿵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전략과 연결되지 않는 디자인 시안 앞에서 내가 결정해야 할 것이 ‘그림’이라고 잘못 느끼기 때문이다.
"A안은 저희가 코어 타겟으로 하고 있는 Z세대들이 선호하는 OOO 트렌드를 반영하고 있고, 시장에 이런 이미지를 포지셔닝하고 있는 브랜드가 아직 없어 차별화된 이미지로 갈 수 있습니다. B안은 XXX 트렌드를 반영한 방향이고, A안보다 소위 '힙함'은 덜하지만 기존에 잘하고 있는 선행 브랜드들과 유사한 이미지로 보다 안전하게 소구 될 수 있습니다. 비용은 A 안이 좀 더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의사결정자 입장에서도 눈에 놓인 것은 디자인 시안이지만 자신이 결정해야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그림이 아니라 '시장 선도를 목적으로 전략적, 공격적 포지셔닝을 할 것인지 또는 위험부담은 줄이고 안전한 시장진입을 우선으로 할 것인지’ 같은 전략임을 알게 된다. 그러면 각 시안의 느낌이 어떻고 색상이 어떻고 하는 코멘트는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미학적 완성도와 스타일 같은 것들은 '디자이너님이 알아서 잘해줄' 영역으로 남겨두게 된다.
저렇게 얘기함에도 ‘아, 근데 내 취향엔 이 쪽인데’라고 하는 클라이언트를 만난다면 이렇게 대답하셔라.
"우리에게 중요한 건 우리(‘네’ 취향이라고 할 수 없으니)의 취향이 아니라, 타겟 소비자의 취향입니다. 클라이언트님은 타겟 소비자가 아니시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