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가 전략적 사고를 해야 하는 이유
이 글은 '팩션(Fact+Fiction)'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후 2시, 회의실 모니터엔 마지막 장표를 띄워놓은 채로 애매한 분위기만 감돌고 있었다. 순간 누군가 테이블 밑으로 숨을 훅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상황은 이랬다. 옆 팀에서 새로운 패키지 디자인의 시안 A와 B 중 무엇이 좋겠냐고 들고 온 것이다. PB 제품*을 야심 차게 론칭했는데, 판매가 저조하다는 이유로 위에서는 패키지 디자인을 또 들쑤셨다. 매출이 잘 나오면 마케팅 덕, 못 나오면 디자인 탓을 하는 것 아니냐며 시작부터 서로 삐그덕 거린 프로젝트기도 했지만, 사실 지금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어쨌거나 바꾸기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기존 디자인에서 이미지 컷이 좀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레이아웃을 조정하고, 제품 라인별로 그루핑이 되게끔 로직을 정리해 왔다. 그중 최종 선택지로 올라온 A안과 B안의 차이는 소소했다. 기본적으로 같은 방향성이었고 PB브랜드의 로고가 모(母)브랜드**의 로고 색상을 그대로 가져온 컬러 버전이냐 아니면 화이트 버전이냐의 차이만 있었다. 여기서부터 회의의 참사가 시작됐다.
디자인에 전략이 부재할 때 나타나는 참사
나머지 디자인 요소가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고, 대표까지 보고될 시안이다 보니 어느 한 시안의 완성도가 크게 뒤쳐지는 상태도 아니었다. 의견을 물으러 온 팀장도, 의견을 줘야 하는 상무들도 다들 무얼 가지고 이야기해야 할지 몰라 곤란한 눈치였다. 직관적으로 눈으로 보이는 차이가 로고 색상뿐이라, 다들 이걸 가지고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흰색이 좀 더 깔끔하고 정리되어 보이네요.”
“아무래도 모브랜드 로고 색이 좀 알록달록하다 보니..”
“그래서 생동감이 있지 않은가요?”
“흰색이 좀 더 신뢰감을 주는 것 같아요.”
그 누구도 설득력 있는 의견이 아니라서 서로 더 애매하게 조심스러워했다. 결론이 날 리가 없다. 색에 무슨 절대 기준이 있겠는가? 팀장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내부 다양한 임직원이 투표한 결과'를 꺼냈다. 투표는 근사한 차이로 화이트 시안이 좀 더 선호도가 높게 조사되었다. 아무래도 내부 직원들은 기존 브랜드 로고를 지겹도록 보아왔고, 망한 PB 브랜드일지언정 이미 좀 익숙했다. 그러니 화이트 버전 로고가 좀 더 색달라 보여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은 그거 말곤 뭐라 다리 기댈 데가 없는 분위기였다. 화이트 시안을 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결론 내렸다. 구석에 앉아있던 대리는 차마 끼어들지 못하고 숨만 삼켰다.
이제 우리는 두 시안을 들고 대표에게로 갈 것이다. 우리는 A 화이트 시안이 깔끔해 보이기도 하고, 투표 결과가 좀 더 잘 나왔다며 A가 좋겠다고 보고한다. 대표의 반응은 둘 중 하나다.
“아 그래요? 그럼 그게 낫겠네요. 앞으로도 디자인 시안은 임직원 투표 결과를 같이 가져오면 좋겠군요”
또는
"그런데 나는 B 안이 오히려 더 활기차 보여 좋은데요. B안으로 가시죠”
둘 중 어느 쪽도 디자이너로써는 영 찝찝한 결론이다.
당신의 결정에 전략이 필요한 이유
이 참사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당연히 전략에 기반한 대화를 했어야 한다. 이 경우에는 PB 브랜드의 Phase***(여기서는 주로 인지도 관점에서), PB브랜드가 모브랜드 내에서 하기를 기대하는 전략적 역할, 모브랜드의 이미지(여기서는 주로 이미지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여부), PB 제품 패키지를 리뉴얼하는 이유 등이 고려되었어야 한다.
먼저 PB 제품 패키지를 리뉴얼하는 이유를 살펴보자. 왜 디자인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는가? 이 경우는 어쨌거나 매출이 시원치 않아서라고 했다. 자, 그럼 우리의 목표는 매출을 늘리는 것이니 왜 이전 디자인에서는 매출이 낮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디자인 리뉴얼을 의뢰한 마케팅팀에서 이유를 알고 있을 것이다. (사실 대부분 잘 모르기도 하니, 알아오라고 요구해야 한다.) 소비자가 제품을 구매하지 않는 이유를 분석했더니 그 이유가 ‘매대에서 너무 눈에 띄지 않아서’ 일 수도이고, ‘모르는 제품/브랜드라 잘 선택하지 않아서’, ‘가격이 비싸서’, ‘구매해 봤는데 질이 별로여서’ 등등이 있을 수 있다.
이 경우는 첫 번째 ‘매대에서 눈에 띄지 않아서’, 또는 ‘모르는 브랜드라서’ 둘 중 하나였다고 가정해 보자. 이유가 만약 첫 번째 '눈에 띄지 않아서' 였다면, 패키지 디자인은 전반적으로 시선을 잡아끄는 방향으로 가는 게 좋다. 때로는 과하더라도 현란한 방향으로 디자인되어야 할 수 있다. 이렇게 디자인했다면 로고가 거슬리지 않도록 화이트인 게 나은 선택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유가 두 번째 ‘모르는 브랜드라서’ 라면, 이 때는 로고가 깔끔해 보이는 것은 고려할 우선순위가 아니다.
여기서 나머지 복잡한 문제들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소비자들은 이 PB브랜드의 존재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모브랜드가 보증하고 있는 브랜드라는 힌트를 주지 않아도 충분히 알만큼 이미 안착된 브랜드인가? 또, 모브랜드의 이미지는 어떤가? 긍정적이어서 PB브랜드와 연계를 가져가는 게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연계를 굳이 하지 않거나 모르는 척하는 게 더 이득인 상황인가? 더 나아가 이 PB제품들에게 기대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단순히 매출을 높여 모브랜드의 이윤 상승 역할을 기대 중이라거나 브랜드를 잘 키워 다른 곳에도 유통시킬 비전을 가지고 있다면, 무엇보다 ‘매대에서 잘 선택될 디자인’ 또는 '독립된 브랜드로 각인될 디자인'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PB 제품/브랜드를 여기서만 팔기 때문에 소비자가 모브랜드로 오게 유인하는 역할까지 기대하고 있다면 ‘모브랜드와 강한 연계를 보여주는 디자인’을 채택하는 것이 별도로 모브랜드와 PB브랜드에게 서로 윈윈이 되는 전략이다.
소비자들은 이 PB브랜드의 존재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모브랜드의 이미지는 어떤가?
더 나아가 이 PB제품들에게 기대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시안에 전략을 더해 보고하면, 원하는 시안을 지킬 수 있다
이제 다시 대표에게 가자. 이제 우리는 이렇게 보고할 수 있다.
“저희가 제품 질은 참 좋은데, 소비자들은 생소하기도 하고 이게 저희가 만든 브랜드라는 걸 아직 잘 몰라서 선택하는 비율이 낮다고 합니다. 이 PB브랜드를 알려서 모브랜드와 상생하는 게 목적이니, 모브랜드와 형제 느낌을 빠르게 전달해 줄 수 있는 B시안이 맞을 것 같습니다. 브랜드 명도 유사하고 색상도 유사하니 저희가 별도로 PB브랜드를 알리는 마케팅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소비자들이 저희 브랜드인 걸 알아챌 겁니다. 사전 임직원 투표는 A 안이 좀 더 높게 나오긴 했는데, 아무래도 임직원은 저희 브랜드를 매일 일로 만나다 보니 너무 익숙해서 소비자와 같은 인지도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 “그래도 나는 화이트가 좋은 것 같으니 화이트로 가세요.”라고 말할 대표는 잘 없다. (있다면… 힘내시길) 대표는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그래요, 나도 처음보곤 화이트가 끌렸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그게 맞겠네요. B안으로 가시죠.”
이게 당신의 시안을 ‘느낌’이 아니라 ‘전략’으로 설득해야 하는 이유다.
*PB제품 : Private Brand 제품이라는 뜻으로, 유통업체가 자체적으로 기획, 개발하는 제품
**모(母)브랜드 : 브랜드 확장 전략에서, 모태가 되는 브랜드. 서브브랜드/신규 브랜드에 대응되는 개념
***브랜드의 Phase : 브랜드가 성장하고 변화하는 단계. 인간에게 유아기, 성년기, 노년기가 있듯 브랜드도 성숙도에 따라 단계가 존재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