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봄을 맞으며

by 여송

겨울 같지 않은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더니 봄나물들이 성급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제일 먼저 봄소식을 알리는 냉이는 온 이파리를 활짝 펴고 가느다란 햇볕을 쪼이기에 여념이 없다. 양지바른 담장 밑에 자리하고 있는 매화나무에는 꽃눈이 부풀러 올랐다. 금세라도 꽃망울을 터트릴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영하를 맴도는 아침 추위에 몸은 움츠려 들었고 얼굴색은 파리하다.


집 앞 언덕 위의 벌거벗은 감나무 위에는 봄나들이 나온 비둘기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마치 나무에 비둘기 열매가 열린 듯하다. 그들은 어둡고 칙칙한 겨울 외투를 벗고 산뜻한 봄옷으로 갈아입을 준비를 하고 있다. 꾸욱 꾸욱 하는 특유의 저음 목소리도 이전보다 밝고 경쾌한 듯하다.

나무 아래 빈 밭에서는 장끼 한 마리가 거닐고 있다. 무리 지어 마실 나온 비둘기 떼나 쌍쌍이 날아다니는 까치들과는 달리 혼자만의 행차이다. 까투리를 무시하다가 그녀로부터 버림받은 것인가? 어쩌면 요즘 인간사회에서 유행하는 이른바 ‘혼행’이 동물 사회에도 나타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원인이야 어찌 되었든 홀로 노니는 모습이 왠지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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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편 산등성이의 배나무 과수원에서는 밤낮으로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다. 지난가을, 농익어서 단내가 물씬 풍기는 배 열매에 달려드는 까마귀와 멧돼지를 쫓기 위해 설치한 이 소리상자를 과수원 주인은 아직도 철거하지 않았다. 멀리서 보면 앙상한 배나무 가지가 솜털처럼 박혀 있는 듯한 능선은 우중충한 하늘 아래에서 도깨비처럼 검게 드리워져 있다. 차디찬 겨울바람을 타고 나뭇가지 사이로 흐르는 애니 로리(Annie Laurie)의 애절한 선율은 듣는 이로 하여금 깊은 우수(憂愁)에 잠기게 한다.


마음 한 구석에 아물지 않은 상처 한 조각이라도 남아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텅 빈 들판처럼 공허한 마음속에서도 까투리와의 단란했던 과거를 추억할 수 있는 장끼는 그나마 가슴 뜨거운 생을 살아본 경험이 있는 것이다. 가슴 깊이 새겨진 사랑이 설령 이별을 맞더라도 아예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테니슨(A. Tennyson)의 말은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진다. 새벽이슬 내리는 언덕에서 애니 로리와의 흘러간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람 또한 어떤 면에서는 인생의 참된 의미를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청초하게 피어 있는 들꽃 한 송이에도 무감각한 사람은 불행하다.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의식주뿐만 아니라 정서적 감성도 필요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는 무의미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빈곤이나 물질적인 결핍보다도 더 큰 문제는 메마르고 황량해져 가는 우리의 마음이다.

비록 우리는 개개인의 의지에 의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인생을 보람 있게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 보다 보람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냉철한 이성이나 번뜩이는 지혜보다는 따뜻한 가슴이 필요하다.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이 예고되어 있는 우리에겐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인생을 살았느냐보다는 얼마나 가슴 뛰는 인생을 살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슬퍼지는 것은 육체적 쇠락보다는 정신적 퇴보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지간한 자극에는 감동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붉게 물든 저녁노을이나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점점 더 무감각해지는 것 같다. 물질만능주의나 자아상실 등 오늘날 우리들이 당면하고 있는 사회적 현실도 이러한 심적 피폐함을 가속화시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요즘같이 쌀쌀하고 황량한 겨울철에 느끼는 정신적 박탈감은 더욱더 심하다.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바깥 풍경을 격(隔)한 창문을 사이에 두고 겨울 공기는 차갑게 식어가고 내 마음도 메말라 간다.


봄은 아직 먼 곳에 있는 것 같다. 몇 차례의 꽃샘추위가 있겠지만 오는 봄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봄이 되면 보랏빛 바이올렛 꽃에서 희열을 느끼고 종달새의 지저귐에 환희를 맛볼 것이다. 비록 신체적 노화는 막을 수 없다 할지라도 마음만은 청춘이 되어 피 끓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으리라. 이것은 우리의 의지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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