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어느덧 겨울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다. 기와지붕으로부터 방울방울 떨어지는 낙숫물이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치면서 가느다란 비명을 지른다.
저 멀리 산봉우리에는 옅은 안개 조각이 걸려 있다. 겨우내 얼었던 계곡물도 봄비에 녹아 흘러내린다. 산골짜기를 휘돌아 흐르는 개울물과 함께 봄은 느릿느릿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초봄에 내리는 비는 땅속에서 겨울잠을 자고 있던 식물들의 뿌리를 깨우고 줄기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억겁의 세월 동안 계속되어 왔던 우주의 법칙에 따라 이 비가 내리고 나면 새싹이 돋고 봄꽃들이 피어날 것이다.
봄은 꽃의 계절이다. ‘꽃피고 새 지저귀는 계절‘이라는 말은 봄을 지칭할 때 흔히 사용되는 표현이다. 장미나 국화와 같이 여름이나 가을에 피는 꽃도 있지만 대부분의 꽃은 봄에 피어난다. 이 시기에 개화하는 꽃은 대부분 외모가 화려할 뿐만 아니라 짙은 향기를 발산한다. 이는 나비나 벌을 불러들여 열매를 맺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것에서도 엄연한 자연의 법칙이 존재하는 것이다.
봄꽃이 피는 데에도 서열이 있다. 우리 주변의 다년생 나무에서 피는 꽃의 경우 매화꽃이 제일 먼저 피고 진달래, 개나리, 벚꽃, 복사꽃, 배꽃 등이 그 뒤를 잇는다. 일 년생 초본식물 중에서는 냉이꽃, 할미꽃 등이 대체로 일찍 꽃을 피우고 민들레, 제비꽃 등은 다소 늦게 핀다.
봄에 피는 꽃들과 달리 차디찬 겨울에 홀로 피는 꽃이 있는데 동백꽃이 그것이다. 꽃 이름에 겨울을 뜻하는 동(冬)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 꽃은 대개 1월에 꽃을 피운 다음 4월 무렵에 진다. 눈 속에서 피는 에델바이스처럼 차디찬 겨울에 홀로 피었다가 다른 봄꽃들이 한창 피어나는 봄날에 져버리는 것이다. 한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이러한 동백의 독특한 특징 때문에 동백꽃은 옛 선비들의 고고함이나 절개를 상징하곤 했다.
꽃을 수정시키는 곤충이 없는 겨울에 꽃이 핀다고 하여 동백꽃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이 꽃은 빨간 빛깔로 동박새를 유인하여 꿀을 제공하고 그들로부터 꽃가루를 받아 늦가을에 열매를 맺는다. 동백만의 모질고 억척스러운 생존의 법칙이다. 이렇게 맺은 열매에서 추출한 동백기름은 예로부터 고달픈 시집살이에 지친 여인들의 머리를 치장하는 화장품으로도 사용되었다.
동백의 붉은색 꽃잎은 장미꽃과 비슷한 색상과 생김새를 가졌으나 겨울에 피는 꽃이라서 그런지 장미꽃처럼 정열적이지도 않고 향기 또한 가지고 있지 않다. 장미꽃이 화려한 정원에서 뭇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아름다운 처녀 같은 꽃이라면 동백꽃은 썰렁한 바닷가나 절벽 위에 외로이 서 있는 한 많은 여인 같은 꽃이다.
동백꽃은 피는 시기와 생존 방식에서 다른 꽃들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꽃이 질 때에도 확실한 차별성을 나타낸다. 매화나 벚꽃, 목련 등 대부분의 봄꽃들은 필 때에는 화려하지만 질 때에는 깨끗하지 못하고 남루하다. 특히 비 온 뒤 우수수 떨어지는 이들의 꽃잎은 처절할 정도이다. 김훈은 봄꽃들의 이러한 최후를 풍장(風葬)이라고 하였다. 반면 동백꽃은 생명을 다할 때면 꽃송이 통째로 툭 떨어져 버린다. 거기에는 조그마한 미련이나 후회도 남아 있을 여지가 없다. 이 꽃은 떨어질 때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황동규는 동백꽃의 이러한 최후에 대해 동백은 목련과 더불어 필 때는 화려하지만 지는 모습은 울음이나 낙담 같은 꽃이라고 하고 있다.
피어난 꽃은 언젠가는 져야 하고 사람은 누구든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있다. 생을 마감하는 마당에서 후회 없는 삶을 살았노라고 하면서 동백꽃처럼 미련 없이 눈을 감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우리 같은 필부(匹夫)들은 이와 같은 성인들의 경지에 다다르지는 못할지라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의무가 주어져 있다. 죽음의 신이 문을 두드릴 때 그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기 위해서 마지막 순간까지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고요한 시골집에서 내 귀에 들리는 소리는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뿐이요, 내게 말을 거는 이는 창 밖에서 지저귀는 작은 새들뿐이다. 지난가을, 대문 어귀에 동백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이 나무가 자라서 꽃을 피우면 그 꽃이 상징하는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길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