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by 여송

성급히 찾아오는 듯한 봄으로 온화해진 들녘은 또다시 남하하는 한랭전선으로 인해 급속히 얼어붙었다. 설 쇠러 고향 온 아들딸들로 인해 모처럼 사람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던 시골 거리는 너무나도 텅 비어 있었다.


건너편 집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솟아올랐다가 딱딱하게 굳은 슬레이트 지붕 위로 떨어진다. 연륜이 켜켜이 쌓인 처마는 시커멓게 그을렸고, 그 사이로 굶주린 참새들이 들락거린다. 고향 왔던 자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 홀로 남은 할머니가 썰렁해진 집안의 한기를 막아보려고 군불을 때고 있는 것 같다. 한 숨의 불기둥이 수은주 기둥을 조금 밀어 올릴지는 모르지만 뼛속까지 파고드는 외로움을 녹여주진 못하리라. 만남은 짧고 그리움은 긴 것이 고향에 남겨진 부모들의 심정이라고 하지만, 가뭄에 콩 나듯이 찾아오는 자녀들을 보낸 후 할머니의 텅 빈 가슴은 한겨울의 하늘처럼 공허하다.


양지바른 담장 밑의 매화나무 가지에는 꽃봉오리가 볼록 솟았다. 하지만 가냘픈 이 생명체는 계절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매서운 한파 앞에서 몸을 움츠린다. 며칠 전 내린 비로 생기가 돌던 텃밭의 쪽파 역시 때늦은 추위와 거센 바람에 고개를 떨구었다. 봄은 쫓겨난 오줌싸개처럼 오들오들 떨면서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다.

아직 겨울이라고 하지만 해는 많이 길어졌다. 대나무 숲 사이로 솟아오른 해가 할머니의 집을 붉게 물들인다. 부자의 저택뿐만 아니라 독거노인의 황량한 오두막에도 겨울 해는 밝게 비치는 것이다.


저 멀리 고속도로 너머 아파트 단지에도 한겨울의 태양은 밝게 빛나고 있다.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는 역설적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역병은 인류 문화의 가장 보편적인 가치인 인간관계마저 단절시켰고, 생존의 기본 요건인 경제활동도 위축시켰다. 나 자신마저도 이곳 고향마을에서 홀로 생활한지도 1년이 넘었다. 모든 업무는 컴퓨터나 전화로 이루어지고,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가끔 마트를 들르는 것이 이곳의 일상이다. 따분한 시골생활이지만 전염병에 대한 감염의 우려가 적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코로나 사태 이전부터 농약살포용 마스크가 20여 개 남아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그 이후로 마스크 한 장 사지 않았으니까.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조그만 바이러스에도 맥을 추지 못하는 존재 또한 인간이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이러한 재난은 풍요로워진 물질문명 속에서 육체적으로 나태해지고 정신적으로 교만해진 현대인들에 대한 경고일지도 모른다.


오후가 되어 햇살이 퍼지자 이웃집 할머니는 불편한 몸을 추스르면서 집 밖으로 나선다. 이전에는 마을의 경로당에서 처지가 비슷한 노인네들과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지만 야속한 병원체는 이러한 소소한 행복마저 앗아가 버렸다. 이따금 찾아오는 자식들의 얼굴과 손자들의 재롱떠는 모습을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인 할머니에게 당분간 이런 호사는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렇다고 마냥 체념한 채로 집안에 누워 있을 수만은 없다. 집 앞의 텃밭으로 다가간 할머니는 거칠어진 손으로 겨우내 강추위로 파리해진 마늘들을 어루만진다. 마치 며칠 전 다녀간 손자들의 얼굴을 쓰다듬듯이...


도시에는 감염병이 돌고 있지만 이 곳 농촌의 공기는 맑고 산뜻하다. 북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까지 쌀쌀하지만 조만간 따스한 남풍이 불어오리라. 유해조수(有害鳥獸)를 쫓기 위해 건너편 산등성이의 과수원에 매달아 놓은 스피커에서는 아이돌 그룹의 노랫소리가 겨울바람을 타고 흐르고 있다.

...

Yeah life goes on

Like this again

...

그들의 노랫말처럼 아무런 예고도 하나 없이 어느 날 세상이 멈춰버렸다. 비록 지금은 이 난국의 끝이 보이지도 않고 출구가 있긴 할까 의심도 들지만 우리의 인생은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우리는 열심히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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