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 머리 위에서 이글거리는 뙤약볕이 내리쬐던 여름도 서서히 물러나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더니, 앞뜰에서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들이 가을이 왔음을 알리고 있다. 우주의 법칙은 어김이 없어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던 맹렬한 한여름 더위도 태양의 고도가 낮아짐에 따라 그 위력을 잃어가고 있다. 가끔 어두운 밤하늘에 빗금을 긋듯이 밝은 빛을 내며 떨어지는 별똥별이 우주의 법칙을 깨뜨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화려해 보이는 이 불꽃쇼도 별들의 탄생과 소멸 과정의 마지막 단계이고 보면, 이 또한 우주 법칙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인간 역시 우주의 한 구성원이기에 우주의 질서를 벗어날 수 없다. 누구든지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쳐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는 우주의 섭리를 거스를 수 없다. 그러나 우주의 질서를 설명하는 이론과 달리 인간의 삶과 죽음은 단순히 과학적인 원리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전자는 로고스(이성) 만의 세계인 반면, 후자는 파토스(감성)도 존재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법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겠지만,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두 가문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첫눈에 서로 사랑에 빠져 비극적 최후를 맞게 되는 인간사회의 감성적 단면은 어떤 물리학 이론이나 기하학적 논리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인간 문명은 점차 기계화되어가고 있다. 집 안에서는 로봇이 청소를 하고, 인공지능 세탁기는 알아서 척척 빨래를 해주고, 내비게이션은 인간을 가고자 하는 장소까지 알아서 데려다준다. 최근에는 알파고라는 인공지능까지 등장해 바둑 게임에서 인간을 능가하는 실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자동차 분야에서는 자율주행차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져, 조만간 운전자 없이 스스로 알아서 주행하는 자동차가 보편화되어 도로를 가득 메우게 될 것이다.
문명이 점차 발달하면 기계가 인간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계문명이 발달할수록 감성은 메마르고 이성이 판치는 삭막한 세상이 될 수도 있다. 민태원은 "청춘예찬"에서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얼음에 싸인 만물은 죽음이 있을 뿐이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따뜻한 봄바람이라고 하였다. 주요섭은 문명한 기계보다는 야만인 인생을 더 사랑한다고 하였고, 정을 인류 최고 과학을 초월하는 생의 향기라고 하고 있다. 하이덱거(Heidegger)는 현 세계를 완전히 기계적인 사고(思考), 이를테면 순전히 계산적이고 조작적인 사고밖에 할 줄 모르는 명상이 배제된 세계라고 본다. 그는 현대 기계문명의 문제점 해결의 한 해답으로 예술을 제안하고 있다.
인간이 기계와 다른 점은 그가 감정을 지닌 동물이라는 것이다. 가끔 인간과 같이 감정이 있는 로봇이 등장했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하는데, 이것은 인간이 기계에 프로그램으로 주입한 감정이지, 기계 자체가 스스로 느끼는 감정은 아니다. 이 감정이 쌓여서 외부로 표출되어 감성으로 나타나며, 음악가는 음악으로, 미술가는 그림으로, 작가는 글로 표현하는 것이다.
벼가 고개를 숙이고 지붕 위의 호박이 누렇게 익어갈 때가 되면 건너편 공동묘지에는 낫을 들거나 예초기를 맨 후손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무덤 속의 조상들은 고달픈 인생살이를 끝내고 이미 백골이 진토(塵土)가 되었건만 후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덤 위에 더부룩하게 자란 풀을 벤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풀을 베지 않는다고 무덤 속의 조상들이 호통을 치는 것도 아니고, 금년에 그것을 벤들 내년에 또 자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올해도 어김없이 나타나 조상들의 산소에서 벌초를 한다. 그들은 기계가 가지고 있지 못한 감성을 지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조상숭배라는 그들의 감성을 벌초라는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예초기를 메고 집 건너편 산등성이의 할머니 산소로 향했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셔서 할머니의 얼굴도 모른다. 산소 입구에 다다르니 작년에는 보이지 않던 밤송이가 탐스럽게 열려 있다. 밤나무는 누가 심은 것도 아닌데 저절로 자라 드디어 올해 열매를 맺은 것이다. 어떻게 여기에 밤나무가 자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성적 판단 이전에 할머니가 손자 보고 싶어 사탕 대신에 밤송이를 준비하셨구나 하는 감성적 생각이 앞선다. 산소라도 좀 더 자주 찾아뵈어야겠구나 하는 다짐을 해본다.
할머니 산소의 벌초를 끝낸 다음 예초기를 차에 싣고 이번에는 꽤 떨어진 부모님의 산소로 향했다. 산허리에 산재해 있는 무덤들 대부분이 추석을 앞두고 벌초가 끝나 이발을 한 것처럼 단정하고 말쑥하다. 건너편 산등성이에서는 한 중년 남자가 느지막이 벌초작업을 하고 있고, 작업에 동원된 예초기의 엔진 소리가 산골짜기를 가득 메운다.
길 가의 감나무 밭의 감들이 가을 햇살을 받아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다. 산소를 향해 산을 오르니 발밑의 여치들이 놀라 도망을 간다. 아직까지 더위는 남아 있어 산을 오르려니 옷이 땀에 젖어 거추장스럽다. 그래도 발걸음은 가볍고 마음은 뿌듯하다.
올해도 어김없이 혼자서 해야 하는 작업이다. 장성한 아들이 두 놈이나 있지만 벌초에 참석할 형편도 되지 않고 설사 시간이 난다 하더라도 낫질이나 예초기 작동도 하지 못하는 그들을 데리고 온들 별로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그들에게 풀 베는 방법을 가르치려 들면 그들은 내년에 또 자랄 풀들을 뭐 하러 베며, 풀을 벤다고 죽은 사람이 알아주기나 하느냐는 등 이성적으로 따지려 할 것이다.
바쁜 일상생활과 핵가족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 강도 높은 작업 등으로 조상의 산소에 대한 벌초가 점점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이를 반영하듯 요즘 들어 장묘 문화도 점차 바뀌어 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상의 장례 시 매장 대신 화장을 선호하며, 화장 후 유골을 산이나 강가에 뿌리거나, 나무 밑에 묻는 수목장을 선택하여 묘지나 납골당을 만들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가 팍팍한 인생을 살아가는 현대인이 피치 못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의 결과이기를 바랄 뿐, 이성적 판단이 인간의 생각을 지배해서 나타나는 결과가 아니기를 기대한다. 이성적 판단이 난무하는 사회는 인간성이 상실되고 정서가 메마른 황량한 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넓은 산소의 풀을 혼자서 베다가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식히기 위해 잠시 쉬기로 했다. 아직까지는 내 혼자의 힘으로 이 작업을 할 수 있으나 언젠가는 한계에 부딪칠 것이다. 게다가 이 산소도 세월과 더불어 스러지고 이지러져 자연의 법칙에 따라 언젠가는 소멸될 것이다. 그럴 바에야 부모님을 다소 빨리 자연으로 보내드리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감성보다도 이성이 앞선 것 같아 고개를 가로젓는다. 착잡한 마음으로 부모님의 유택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니 장래가 걱정스러워 안쓰러운 마음 금할 길 없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린다.
"내 죽으면 이 산소를 어이 할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