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여기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지만 대다수가 행복을 들지 않을까 생각된다.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일터로 나가 돈을 벌며,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는다. 이런 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최고선(最高善)을 행복이라 하였다.
그런데 요즈음은 행복의 수단을 마치 행복 자체인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한 예로 돈은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필수 요소이지만, 그것을 인생의 최고 목표로 삼는다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돈이 많은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으며, 반대로 돈이 적어도 행복한 사람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이란 어떤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되는 것이 아니고, 개인의 주관적인 인식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떠했는지는 두 가지 관점에서 평가될 수 있다. 첫 번째는 다른 사람에 의해 그 사람의 인생살이가 평가되는 경우로서, 이는 외적인 관점에서의 평가이며 제3자에 의한 객관적인 평가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우선 객관적인 평가를 잘 받기 위해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올바른 가치관이나 인생관을 가지고, 성실히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다른 하나는 본인 스스로가 자신의 살아온 인생에 대해 평가하는 경우로서, 이는 내적인 평가이며 다분히 주관적인 평가이다. 주관적인 평가의 경우, 똑같은 조건에서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평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만족할 줄 아는 인생을 살아감으로써 보다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고, 훗날 자기가 살아온 인생에 대해 높은 주관적 평가점수를 매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풍요로운 물질문명 속에서 살고 있다.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인해 과거 3, 40년 전에 비해 생활수준이 급격히 향상되었다. 그렇다고 지금이 과거보다 더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대답에 대해서는 다소 망설여진다.
과거 가난했던 시절에는 여러 가지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가족 간에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는 생활 속에서 부모와 자식 간에는 따뜻한 정이, 형제간에는 끈끈한 우애가 있었다. 또한 사회 구성원들도 각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로를 돕고 존중하는 도덕적인 양심이 있었다. 반면 물질만능주의와 배금주의 사상이 팽배해진 오늘날에는 경제적인 가치가 가족 간의 의리나 사랑보다 더 중시되는 상황도 나타나고 있다. 이는 행복의 본질 대신 수단을 우선시하는 가치관이 전도된 상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의 생활이 과거에 비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데 있어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또 다른 요인 중의 하나는 황폐화된 주위의 생활환경이다. 어렸을 때만 해도 우리는 오염되지 않은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놀며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 발달된 문명을 누리는 대가는 너무나 혹독하다.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불리던 국토는 온갖 쓰레기로 병들어 신음하고 있어 어디 마음 놓고 몸을 누일만한 자리조차 없다. 갖가지 종류의 물고기들이 헤엄치던 강이나 개울은 농약의 오, 남용과 폐수 무단방류로 죽음의 하천으로 변한 지 오래다. 이러한 환경적 재앙으로 인해 주위에서 하나 둘 사라져 가는 야생 동, 식물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우리는 과거보다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엊그제 누렇게 벼가 익은 논길을 거니다가 앞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곤충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건 실로 오랜만에 보는 메뚜기였다. 머리 꼭대기에 안테나처럼 솟아오른 두 개의 더듬이, 여러 개의 작은 눈이 모여 부리부리하게 튀어나온 겹눈, 앙다문 입술, 용수철처럼 탄력 있는 양쪽 다리, 이동할 때 주로 다리를 사용함에 따라 퇴화되어 자그맣게 등에 붙어 있는 날개, 이들 모든 것이 추억 속에 남아 있는 메뚜기 모습 그대로였다. 예전 같으면 벼 줄기에 붙어있는 요녀석을 가차 없이 쫒아버렸겠지만,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그래 실컷 먹어라. 쌀 몇 톨 덜 수확해도 괜찮으니, 열심히 자라 자손만대 번영하여 우리 주위에 다시 나타나 주렴'
메뚜기도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강한 턱으로 열심히 벼 잎을 갉아먹고 있다. 메뚜기의 딱딱한 피부가 전쟁터에서 돌아온 개선장군의 갑옷처럼 기울어가는 가을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다.
언제였던가? 누렇게 익어가는 벼논 사이 논두렁길을 걷노라면 발 앞에서 메뚜기들이 군무하듯 날뛰는 모습을 본 때가. 먹을 것이 부족하여 배고팠던 시절, 다 자라 갈색으로 변한(이 경우도 과일처럼 메뚜기가 '익었다'는 표현을 썼음) 메뚜기들을 잡은 후 병에 넣어 집으로 가져와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맛있게 볶아먹던 시절 또한 언제였던가?
비록 벼 잎을 갉아먹어 농부에게는 달갑지 않던 곤충이었지만 때로는 우리에게 간식이 되어 주기도 하고, 들판을 가로질러 달릴 때에는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주기도 했던 메뚜기들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주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인간들에 의한 무분별한 자연파괴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메뚜기들로 하여금 더 이상 생존하기 힘든 상황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추억 속으로 사라진 메뚜기들이 돌아왔다는 사실에 나는 희열을 느끼며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신기해서 가까이 다가가서 보기도 하고 쫓아보기도 하는데 반갑기 그지없다. 그토록 험난한 환경 속에서도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메뚜기는 보호색을 띤다. 한여름에는 주위의 색깔에 맞춰 녹색을 띠다가, 가을이 되어 나뭇잎이나 풀이 마르면 갈색으로 몸 색깔을 바꾸어 자신을 천적으로부터 보호한다. 생존을 위해 이렇게 발버둥 치는 가냘픈 생명체에 대해 인간은 무심하게도 이들을 열악한 환경 속으로 밀어 넣어 고통과 좌절을 맛보게 하였고, 그 결과 이들로 하여금 생을 포기하도록 만들고 말았다.
인간들도 이젠 더 이상 자연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인식하고 있기에 메뚜기들에게 최악의 상황은 지난 듯하다. 메뚜기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은 자연환경이 점차 나아지고 있고 이로 인해 생태계가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동물의 먹이사슬에서 최하위에 속하는 메뚜기들이 다시 등장했다는 것은 조만간 상위 계급인 개구리나 뱀들도 다시 나타날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리 하찮고 보잘것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있을 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자연환경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자연이 파괴되면 인간을 생존할 수가 없다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자연을 보호하고 생태계를 회복시키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의 삶의 질도 높아지고, 그에 따라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메뚜기들아! 곧 다가올 춥고 긴 겨울을 무사히 넘기고, 내년 가을에는 보다 힘차게 나와 같이 들판을 달려보자. 그렇게 하여 너희들이 제비들의 먹이가 되어 그들에게 강남으로 날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제공하고, 카바레에서 유부녀들을 유혹하는 또 다른 제비족들의 안주가 되어, 지구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보다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촉매가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