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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송 Nov 05. 2017

"어머니, 챙이가 다 닳았어요"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다. 간혹 보리나 자두 같이 여름철에 출하되는 농작물도 있긴 하지 대부분의 곡류나 과일들은 가을에 수확한다. 이 계절이 오면 논과 밭에서는 농부가 봄부터 씨 뿌리고 가꾸어 온 농작물이 익어가고, 산과 들에서는 저절로 자라난 온갖 종류의 열매들이 결실을 맺는다. 이러한 결실은 인간이나 야생동물의 먹이가 되어, 그들의 생존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한다. 이렇게 먹을 것이 많은 가을철에 대해, 예로부터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계절이라는 속담이 생겨난 것도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시골집 텃밭에는 주로 콩, 들깨, 땅콩, 마늘, 파 등을 재배하는데, 이들 농작물은 농사짓기가 수월하고 시골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먹거리가 되는 품목들이다. 콩은  우리네 아침 밥상의 주 메뉴로서, 삶은 콩을 믹서에 갈아 만든 콩국과 샐러드 한 접시는 바쁜 출근길에 시간을 절약하여 주고, 단백질이나 탄수화물 등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소를 공급해 준다. 이 작물은 또한 우리의 전통음식인 된장국이나 쌈장의 원료가 되는 된장을 만들기 위한 주된 식재료가 된다. 들깨는 여름철에는 깻잎무침이나 쌈의 주재료가 되는 깻잎을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가을철 열매가 익으면 그것을 빻은 가루로 깨죽이나 시레깃국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다용도의 식물이다. 마늘, 파 등은 음식을 만들 때 자주 사용하는 양념이 되어, 이들이 필요할 때마다 도시의 시장이나 마트에 가야 하는 번거로움을 덜어준다.

  내가 재배하는 콩이나 들깨를 가을철에 수확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농기구에 “챙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곡식 따위를 까불러 쭉정이나 티끌을 골라내는 도구로서 버들이나 대를 납작하게 쪼개어 앞은 넓고 평평하게, 뒤는 좁고 우긋하게 엮어 만든 농기구이다. 이 기구에 대한 표준말은 “키”이나 우리 동네에서는 이것이 “챙이”라는 사투리로 불리었다.

  키는 예로부터 여러 가지 용도로 쓰여 왔다. 주 용도인 곡식을 선별하는 일 외에도 밤에 이부자리에 오줌을 싼 아이들이 두 번 다시 이부자리에 오줌을 싸지 말라는 일종의 훈계로 이 기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이웃집에 소금을 얻으러 다니게 하는 풍습에도 사용되었고,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농사 점이나 풍년을 기대하는 주술적인 의례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키의 또 다른 성격으로는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듯 부정한 요소를 가려내는 변별성을 꼽을 수 있으며, 이러한 속성은 우리의 전통문화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그리스도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라고 하여, 참된 믿음을 가진 자와 위선자를 구분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키를 사용하고 있다.

  이번 가을에도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콩과 들깨를 수확한 후 알맹이와 쭉정이를 분리하기 위해 창고에서 챙이를 꺼내 왔다. 예로부터 챙이질은 여자가 하는 일과였으나,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은 남녀를 구분하여 업무를 분장할 상황이 아니다. 먼저 햇볕에 말린 콩대를 대나무 막대기로 두드려서 열매와 줄기를 분리한 후, 콩 열매와 검불들이 뒤섞인 잔해들을 챙이에 퍼 담은 다음 챙이질을 시작하였다. 보기에는 쉬워 보이나 이 작업에도 요령이 필요하다. 챙이를 단순히 상하로 오르내리는 챙이질로는 열매와 검불들이 잘 분리되지 않는다. 챙이의 안쪽(사람 몸통 쪽) 부분은 상체에 고정시키듯 하고, 바깥쪽(끝) 부분만 상하로 오르내리는 V자 형태로 까불러야 알곡과 부스러기들이 잘 분리된다. 온갖 먼지를 날리면서 챙이질을 하고 있는데, 대문 밖에서 할머니들이 남자도 챙이질을 하느냐고 안쓰러운 듯이 한마디 하고 지나간다.

  요즘 세상에 여자가 챙이질을 하는 것도 보기 힘든데 남자가 이 일을 하고 있으니, 이는 필시 무형문화재감이다. 나름대로 한다고는 하지만 예전의 어머님의 챙이질 솜씨에는 한참 못 미친다. 어머니는 챙이에 곡식을 한 가득 담고서도 챙이질 몇 번 만에 알맹이와 껍질을 완벽하게 분리하셨다. 챙이질을 할 때 챙이의 주된 궤적은 상하 움직임인데, 어머니는 챙이질 중간에 한 번씩 상하 궤적 대신 전후 궤적으로 챙이를 낚아채듯이 움직이기도 하셨다. 이러한 동작은 챙이의 안 쪽(사람 쪽)에 있는 곡식들을 바깥쪽으로 튕겨 내어, 곡식들이 골고루 챙이질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이 작업에서는 나는 완전 초보자로 어머니의 실력에 한참 못 미친다고 느끼곤 했다.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챙이는 대나무로 만들어진, 그 옛날부터 어머니가 사용하던 도구이다. 어머니 가신 지 14년이 지났으니, 이 챙이의 나이는 20세는 족히 될 것이다. 옛날에는 이 농기구도 비싸고 귀한 것이라 어머니는 소중하게 이 기구를 사용하고 보관하여 왔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어머니는 햇볕에 이 기구를 말려 그늘에 보관하였고, 혹 조그만 구멍이라도 생기면 곡식이 샐까 봐 정성스럽게 헝겊으로 기워 사용하여 왔다. 그런데 이 챙이가 우악스러운 남자의 손에 쥐어진 후 급속도로 닳아 떨어지고 망가지더니, 이젠 거의 사용하기가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농업에 있어서 기계화가 많이 진행되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소량의 농작물을 까불러 깨끗하게 하는 작업에는 이 챙이를 쓴다. 그래서 각 방면에서 현대화된 오늘날에도 시골집마다 챙이가 필수품처럼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 농기구가 없으면 내가 재배한 텃밭의 콩과 들깨의 수확이 어려워진다. 더구나 요즈음엔 이 챙이를 파는 곳이 없어 새 챙이를 구하기 힘들다는 생각에 갑자기 불안감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챙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선, 버드나무나 대나무를 납작하게 쪼개어 일정기간 동안 그늘에서 말려야 한다. 다음 단계에서는 준비된 재료를 가지고, 고난도의 기술을 가진 장인이 엮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작업에 있어서도 챙이의 바깥 부분은 넓고 평평하게 엮어가다가, 안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면서 가운데 부분이 움푹 들어가도록 엮는 기술이 필요하다. 바닥 작업이 마무리되면 챙이의 안쪽의 수직 부분을 엮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우선, 굵은 대나무를 직각으로 휘어 지주대를 세운 후, 그 지주대를 의지하여 쪼갠 대나무 등을 엮어나간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대나무로 챙이의 가장자리 부분을 감쌀 테두리를 만든 후, 칡이나 등나무 넝쿨 등으로 챙이의 엮은 부분과 테두리를 묶어 고정시킨다. 이 테두리는 챙이의 가장자리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방지하여 챙이 수명을 연장하여 주고, 곡식이 챙이 밖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막아 주며, 챙이의 손잡이가 되어 챙이질을 용이하게 해준다.

  이와 같이 제작에 오랜 시간과 고도의 숙련된 기술이 필요한 챙이가 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챙이를 만드는 데 필요한 노력과 비용은 큰 데 비해, 이렇게 힘들게 만든 챙이가 잘 팔리지도 않고 값도 제대로 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느끼는 바이겠지만, 어머니 가신 후 어머니의 유품이 하나, 둘 없어질 때마다 가슴속에 밀려오는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머니가 정성스레 담가 주신 깻잎장아찌가 바닥을 보여 갈 무렵 형언할 수 없는 공허함이 엄습하여 왔고, 마지막 깻잎을 입에 넣는 순간 목이 메어 음식을 삼킬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만들어 놓은 항아리 속의 된장이 다 떨어지는 순간, 앞으로는 어머니의 된장을 더 이상 먹을 수 없다는 사실에 눈앞이 캄캄 해지는 절망감을 느껴야 했다.

  지금 내 앞에 놓인 또 다른 어머니의 유품이 이젠 작별을 고하려 한다. 어머니의 정성과 손때가 묻은 이 챙이가 없어지면 무엇으로 곡식 알맹이와 검불들을 분리할꼬? 애타는 내 심정을 이 무심한 도구는 알아줄 리 없고, 집 앞 소나무의 까치 한 쌍마저 서로 깍깍거리며 내 속을 뒤집어 놓는다. 챙이질을 할 때마다 귀퉁이가 연방 떨어져 나가면서 너덜너덜해지는 챙이를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린다.


       “어머니, 챙이가 다 닳아 못쓰게 되어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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