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젖은 행복감

by 여송

오랜만에 비다운 비가 내렸다. 가뭄과 더위로 축 늘어졌던 식물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생명수를 마시고선 활기를 찾는다. 뜨거운 햇빛으로 돌돌 말려 있던 옥수수 잎사귀도 한 줄기 빗줄기에 풀 먹인 모시처럼 빳빳해졌다. 이 농작물은 잎의 표면적을 줄여 수분의 증발을 최대한 억제함으로써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생명을 유지해 왔던 것이다. 옥수수의 생존 투쟁이 놀랍기만 하다.


앞산의 뻐꾸기 노랫소리도 맑고 경쾌하다. 모처럼 내린 단비는 동물들에게도 생명의 활기를 불어넣어 둥지를 틀고 새끼를 키울 것이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사람의 몸은 70%가 물로 구성되어 있다. 물이 없으면 인간은 일주일 정도밖에 살 수 없다고 한다. 반면, 음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물로만 살 수 있는 기간은 대략 한 달에서 두 달 사이라고 한다. 이는 인간의 생존을 위해 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5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기억나는 사건 한 가지가 있다. 1967년 충남 청양의 한 광산에서 갱도가 무너지는 사고로 광부 한 명이 매몰되었다. 그는 지하 125m 갱도 속에서 보름이 넘는 기간을 버티다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지하 막장에서 먹거리 하나 없이 오랜 시간 동안 그의 생명을 유지하게 한 원동력은 갱도를 따라 흐르는 물이었다.


생명체에 대한 물의 중요성을 반영하듯 지구 표면의 75%는 바다가 차지하고 있다. 이 물은 바닷속 해양생물의 생명의 근원이 된다. 뿐만 아니라 바닷물은 수시로 증발, 순환하여 지상에 비를 뿌림으로써 육지의 동식물에게도 생명수를 공급한다. 지구면적의 대부분이 생명체들이 필요로 하는 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이와 같은 물리적, 지구과학적인 속성 외에도 물은 인간의 정신적, 심리적 상황을 표출하는 매개체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사람들은 극도로 슬프거나 기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이는 인간 내면의 슬픔이나 환희가 눈물이라는 카타르시스로 인체 외부로 발현되는 신체기능의 일종이다. 비누는 몸을 씻어주고 눈물은 마음을 씻어준다는 유태 격언도 이러한 현상을 잘 나타내어 준다.


인간 사회가 갈수록 삭막해지듯이 기후도 점차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기상관측 사상 가장 더웠던 봄이었다느니, 5월 강수량으로는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는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낭비벽이 심한 사람을 지칭하는 ‘돈을 물 쓰듯 한다’라는 속담은 요즘 같은 가뭄에는 ‘물을 돈 쓰듯 한다’로 바꾸어야 할 형편이다.


지구 상을 휩쓸고 있는 이상기후는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경고일지 모른다. 이러다간 가뭄과 그로 인한 모래바람으로 농토를 잃어버리고 고향을 떠나는 ‘분노의 포도’ 속의 톰 조드 일가처럼 우리도 고향 혹은 지구를 떠나야 하는 날이 다가올 수도 있다.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광부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일차적인 요인은 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극한의 공포 속에서 그를 지탱하게 해 준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강인한 의지와 정신력이 아닐까? 물은 신체적으로 그의 생명을 연장해 주었다면 삶에 대한 의지는 정신적으로 그의 삶을 이어준 원동력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대지를 촉촉이 적셨던 비구름도 서서히 동쪽으로 물러나고 있다. 집 뒤꼍 담장 가에 심은 쥐똥나무는 하얀 꽃을 피웠다. 빗방울을 머금은 꽃잎이 어린아이의 눈동자처럼 해맑다. 앞쪽 텃밭에는 방울토마토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렸다. 기나긴 가뭄과 무더위라는 고난의 가시밭길을 강인한 정신력으로 극복해 내고 마침내 꽃을 피운 생명체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 식물의 생명이 물을 요구하듯이 우리에게는 눈물이 요구되며, 흘린 눈물의 양이 사람을 승화시킨다는 윤후명의 말처럼 우리에게도 인생의 난관을 극복하고 보람과 희망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행복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미래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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