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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맛을 찾아서-오디

by 여송

경제발전이나 인구증가 등으로 우리 주위의 환경이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단기간에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한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은 국민들의 소득수준을 높이고 그 결과, 우리의 생활을 풍족하게 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급격한 성장 이면에는 환경오염이나 빈부격차, 배금주의 등 부작용도 만만찮게 발생하고 있다.


사회 환경의 변화로 우리 주위의 전통적인 관습이나 풍물들 많이 잊히거나 사라져 가고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누에치기이다. 누에는 봄에 알에서 깨어나 여름 내내 자라 가을이 되면 자신의 거처인 누에고치 속으로 들어가 월동을 한다. 누에는 누에고치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입에서 가느다란 실을 뿜어내는데, 이 실이 바로 비단 즉, 실크의 원료가 되는 견사(絹紗, 명주실)이다. 누에는 일생동안 뽕잎만 먹고 살기 때문에 누에를 치려면 먼저 뽕나무를 심은 뽕밭을 조성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누에치기는 농가의 짭짤한 소득원이었던 것 같다. 누에고치를 수매하는 날이면 양잠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던 면사무소 앞은 시장 장터를 방불케 했다. 이때에는 너도나도 두둑한 주머니에, 막걸리 한 사발로 취기가 오른 농부들의 주름진 얼굴에 모처럼 환한 미소가 감돌곤 했다.


이러다 보니 농가에서는 밭이나 언덕, 야산 등에 뽕나무를 심었고, 그 결과 이 나무는 시골 풍경에는 빼놓을 수 없이 등장하면서 농촌 사람들의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예로부터 뽕나무를 소재로 한 영화나 소설이 흔한 것도 이와 같은 현상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비록 뽕나무밭이 물레방앗간과 더불어 주로 남녀의 은밀한 만남의 장소로 묘사되는 곳이었지마는...


다른 노동집약적 산업과 마찬가지로 양잠업도 인건비 상승으로 그 경쟁력을 잃으면서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와 동시에 소득 수준의 향상으로 과일 소비가 늘어나면서 농가에서는 뽕나무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사과, 배, 복숭아 등 과일나무를 심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뽕나무는 점차 그 모습을 보기 힘들게 되었고,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그러나 뽕나무 역시 농촌 사람들의 질긴 인생처럼 그 생명력이 모진 것 같다. 농부들의 박해와 수난의 낫과 톱질을 피해 밭둑이나 강둑 등지에서 모진 목숨을 이어가던 뽕나무들이 요즘 제법 많이 번식하였다. 여름철 소를 먹이기 위해 꼴을 벨 필요도 없고, 겨울철 난방이나 취사를 위해 땔감을 구해야 할 필요도 없어진 요즈음의 세상에서, 야산이나 들녘에서 자생하는 뽕나무들은 이제 먹이사슬의 정점에 위치한, 강력한 천적인 인간의 손길을 피해 그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돈벌이되는 누에치기 시절 대접받던 과거의 모습과는 달리, 이 나무는 지금은 잡초 속에서 부대끼며 외로이 그 존재를 이어가고 있다.


지금은 쓸모가 없어져 무성해진 뽕잎 사이로 간간이 검거나 붉게 익은 오디들 역시 무관심하게 버려져 있다. 오디는 뽕나무 가지에 열리는 열매로서, 처음에는 연녹색 빛을 띠다가 익어가면서 점점 붉은색으로 변한다. 이 상태의 오디는 색상은 화려하나 육질이 단단하면서 단맛은 없고 신맛만 난다. 그러다가 완전히 익으면 열매가 물렁물렁해지면서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보라색으로 변하는데, 이때 오디 특유의 향과 당도가 절정에 달한다.

뽕나무 잎이 가난에 찌든 옛 양잠농가들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었다면, 뽕나무 열매는 여름철 보릿고개로 배고픔에 허덕이던 당시의 어린아이들에게 달콤하고 향기로운 맛을 선사하던 일등 간식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책보따리를 마루에 팽개치고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이 집 주위의 뽕나무였다. 까맣게 익은 오디는 당시 세상 그 어떤 음식보다도 달콤한 맛이었으며, 입 안에서 감도는 오디 특유의 향은 최고급 향수 이상으로 향기로웠다. 뽕나무 가지에서 오디를 훌치듯 한 움큼 따서 입안에 털어 넣다가 보면, 때로는 노린재도 함께 입속으로 들어가 기겁을 한 적도 부지기수였다. 노린재는 스컹크 등과 같이 악취로 적을 쫓는 곤충으로 잘 익은 오디를 무척 좋아한다.



세월이 흐른 후, 가끔 고향에 들르면 고향집 주변에 저절로 자라난 뽕나무에 열린 오디를 따서 맛보기도 했으나 예전의 맛이 아니라서 실망한 적이 있다. 오디의 맛이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터이니, 필시 우리의 입맛이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배고픔을 모르고 지내면서 음식에 대한 욕구가 예전처럼 강하지 않은 데다가, 단맛과 매운맛 등 강렬한 자극에 미각세포가 둔감해져서 예전의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이런 연유로, 오디뿐만 아니라 산딸기나 머루 등 자연에서 자생하는 추억의 먹거리들에서 예전의 그 맛을 느끼지 못하는 공통적인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가뭄으로 온 대지가 타들어가는 최근 날씨에, 과일들의 당도가 높아졌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집에서 다소 떨어진 밭 주변에서 자생하는 뽕나무의 오디를 한 개 따서 그 맛을 보았다.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는 듯이, 금년의 오디는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예전의 오디 맛 그대로였다. 이 맛은 또한 내 무의식 속에 잠재하는 유년시절 추억 속의 맛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한낮의 무더위를 피해 다음 날 새벽 일찌감치 작업을 시작하였다. 일단 풀쐐기나 진드기 등의 벌레들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안전화와 두꺼운 옷과 장갑으로 중무장을 한 다음, 본격적으로 주위의 뽕나무를 찾아 오디 수확에 들어갔다. 까맣게 익은 오디는 조그만 충격에도 떨어지므로 신중히 따야 한다. 뽕나무 가지를 하나씩 휘어잡아 조심스레 오디를 따기 시작했다. 진한 검보라색 과즙이 배어 나오는 오디 열매에 붙어서 아침식사를 하던 노린재가 인기척에 놀라 도망을 간다. 급한 나머지 뒤꽁무니의 악취를 분비하는 샘을 열지는 못했는지 노린재 특유의 고약한 냄새는 나지 않는다. 다른 오디 열매에서는 개미들이 일렬로 서서 열심히 단물을 빨아먹고 있다. 그 주위로 커다란 달팽이가 뽕나무 가지에 붙어 오디인지 뽕나무 잎인지 모를 재료로 아침 식사를 막 시작하려고 한다. 곤충들이 끓는 곳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거미도 뽕나무 가지 사이에 거미집을 짓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거미줄이 깨끗한 걸 보니 이 녀석의 오늘 아침은 굶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육식성인 거미는 이 맛있는 오디는 먹지 않을 것이다.



나도 이들 틈에 끼여 열심히 오디를 땄다. 조용한 아침, 모처럼의 진수성찬을 여유 있게 즐기려는 손님들 사이에 웬 초청받지 않은 거대한 동물이 끼였느냐고 불평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듯하다. 그렇든 말든 나는 잘 익은 달콤한 오디를 수시로 입 속으로 넣으면서 추억 맛에 빠져들곤 한다.

한 때 부귀영화를 누리며 대접받던 뽕나무들이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가 요즘에 와서는 건강식품으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뽕나무는 당뇨병이나 저혈압에 좋다고 알려지면서 그 잎과 뿌리를 우려내어 차로 마시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뽕잎은 요즘 들어 나물이나 쌈 재료로 이용되기도 하는데,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오디 열매 외의 뽕나무 가지나 잎은 식용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오디는 블루베리 등과 같은 보라색 열매들이 공통으로 가지는 항산화물질을 많이 내포하고 있어 노화 예방과 불면증에 효능이 있다고 한다.



두어 시간 작업 끝에 한 3kg 정도는 됨직한 오디를 땄다. 아직 빨간 색깔을 띤 오디 열매가 제법 많은 것으로 보아 며칠 후에 까맣게 익은 놈들을 다시 수확할 수 있을 것 같다. 수확한 오디를 담기 위해 가지고 간 소형 아이스박스가 묵직하다. 잘 익은 오디는 금세 변질되기 때문에 술로 담그거나 설탕에 버무려 발효액을 만들어 보관하여야 한다. 올여름 내내 추억의 오디 맛을 볼 생각을 하니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경쾌하고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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