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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추억 속의 강-영천강

by 여송

미국의 컨트리 가수, 존 덴버(John Denver)의 노래 중에 'Thank god I'm a country boy'라는 곡이 있다. "촌놈"으로 태어난 나에게는 수긍이 가는 노래 제목이다. 내가 이 가수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가 콜로라도 주, 로키산맥 기슭의 덴버(Denver) 근교에서 자신의 이름마저 그곳 지명으로 바꾼 채, 촌놈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의 노래 역시 시골 생활의 정서를 잘 나타내고 있으며, 시골 생활을 동경하는 촌놈들에게 특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1997년 미국 동부 여행 시, 워싱턴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여정 중에 편안한 고속도로를 이용하지 않고 애팔래치아 산맥 능선을 따라 나 있는 험난한 길인 블루 리지 도로(Blue Ridge Park Way)를 이용한 것도 그의 가장 유명한 곡인 'Take Me Home Country Road' 속에 이 지명이 등장했기 때문이며, 2012년 서부 여행 시 캘리포니아 몬터레이(Monterey ) 해변을 여행한 것도 그곳이 그가 비행기 사고로 숨진 곳이어서 나를 그곳으로 이끈 무언가가 있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는 시골서 태어나서 유년기의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는 것을 무척 다행으로 생각하지만, 그중에서도 강변 마을에서 태어난 것에 대해 특히 더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유년기의 추억 중 대부분이 강가에서 놀면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같은 촌놈이라도 강변에서 자란 놈은 어렸을 때의 다양한 추억들이 훨씬 더 많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을 강변에서 보낸 것과 관련해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강가에서 자라났다고 모두 강에 대한 추억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강 중에서도 낙동강이나 한강처럼 규모가 큰 강은 강물 속에서 물장구를 치거나 강변에서 소를 먹일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초등학생 정도의 어린애들이 즐길 수 있는 강은 규모가 다소 작은 강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규모가 너무 작은 개울 혹은 시내 등은 물가에서 즐길 수 있는 놀이가 한정되어 있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마을에는 영천강이라는 아담하고 호젓한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이 강은 경남 고성군의 연화산 도립공원에서 발원하여 진주시 금곡면을 거쳐 우리 마을을 감싸 흐른 다음, 금산면 입구에서 남강과 합류하여 최종적으로 낙동강으로 이어진다. 이 강은 폭이 200m 정도 되는 다소 규모가 작은 강으로서, 상류 지역에 공장이나 축사와 같은 특별한 오염원이 없어 아직까지도 수질이 상대적으로 양호한 편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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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강은 예로부터 우리 마을에 농촌 생활에 있어서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하여 왔다. 우선 강 지류의 넓은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제공한다. 강 상류에 보를 막아 인위적으로 수위를 높인 후, 낙차를 이용하여 주변의 농경지에 물을 공급하는데, 이는 우리 조상들이 고안해 낸 훌륭한 관개 방식이다. 보 밑에는 하류에서 올라온 물고기들이 더 이상 상류로 거슬러 오르지 못한 채 배회하고 있기 때문에, 상시 우리에게 좋은 어장을 제공하였다. 또한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에는 강물이 주민들의 식수로 사용되었고, 강변의 빨래터는 아낙네들의 세탁소인 동시에 처녀총각의 혼례, 회갑잔치 등 동네 소식을 듣는 정보제공 장소로 사용되었다. 여름철, 농사일이 끝나는 저녁 무렵에는 마을 사람들의 공동목욕탕으로, 배고플 때 각종 어류나 조개들을 공급하는 천연 양식장으로 이용되었다. 정월 대보름날 이른 새벽에는 우리 어머니들이 강가에서 제물을 차려 놓고 용왕에게 제를 올리면서 가족의 건강과 가정의 화목을 기원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영천강은 마을 주민들의 영적(靈的)인 행사의 장소였다.

어렸을 때부터 강가에서 자란 우리들은 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수영하는 법을 배웠으며, 초등학교 시절에는 강변이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여름에는 소를 몰고 나와 강변에 매어 놓고 우리는 오후 내내 강에서 물놀이를 하며 더위를 식히곤 했다. 당시만 해도 강 속에는 다슬기나 재첩 등은 지천으로 널려 있었고, 가물치, 쏘가리, 잉어, 은어 등 고급어종은 물론 납지리, 피리, 붕어 등 여러 종류의 물고기들이 살고 있었다. 우리는 물놀이하면서 맨손으로 이런 물고기와 다슬기를 잡고, 말조개나 재첩 등의 조개를 캐내기도 하면서 더운 여름 오후를 보내곤 했었다. 그러다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때면 소를 강물로 끌고 들어가 깨끗이 목욕을 시키면서, 때로는 강물 속에서 소꼬리를 잡고 수상스키도 타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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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되면 영천강은 또 다른 놀이거리를 제공하곤 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썰매 타기와 얼음배 타기이다. 얼음배 타기는 꽁꽁 언 얼음을 톱이나 도끼로 일정한 크기로 잘라 강물에 띄워 타고 다니는 놀이인데, 한참 재미있게 타다 보면 얼음이 점차 녹아 깨지면서 배 위에 있던 아이들이 모두 강물 속으로 빠지곤 했다.

이렇게 우리에게 친숙한 강도 때로는 태도가 돌변하여 집중호우 때면 강물이 범람하여 농작물을 휩쓸어 가기도 하고, 상류에서 돼지나 닭 등 가축들이 떠내려 오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우리는 자연의 힘 앞에서 나약한 인간의 존재를 실감하기도 했다. 더구나 여름철에는 수영미숙으로, 겨울철에는 얼음이 깨지면서 익사사고로 강에서 죽은 아이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와 같이 강은 우리에게 생명이 자라나고 스러지는 삶과 죽음의 현장이었으며, 그곳에서 우리는 인생을 체험해 왔다.

봄이면 또 하나 생각나는 영천강의 명물은 황어이다. 이 물고기는 평소에는 바다에서 살다가 봄이 되면 산란을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온다. 황어는 평소에는 흰색을 띠다가 산란기가 되면 몸통이 붉은빛으로 변하는데 그래서 황어라는 이름이 붙은 것 같다. 봄비가 내린 후 강물이 불어나면 황어 떼로 강 전체가 붉게 물들곤 했는데, 이때를 놓치지 않고 사람들은 투망이나 훌치기낚시로 이 물고기를 가마니 가득 잡기도 했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 불행히도 영천강에는 물고기가 씨가 말랐다. 가장 큰 원인은 뭐니 뭐니 해도 농약이나 폐수로 인한 수질오염이다. 주변 농경지에서 흘러 들어오는 농약과 생활폐수는 1 급수였던 영천강의 수질을 급격히 오염시켰고, 상류에서 예전의 수박이나 돼지 대신 떠내려 온 비닐이나 스티로폼 등 각종 쓰레기들이 강바닥을 뒤덮고 있다. 이런 곳에서 생명체가 살아가기란 기적에 가깝다. 가뭄이나 홍수를 방지한답시고 벌인 하천 정비공사도 영천강의 생태계를 파괴시킨 요인 중의 하나이다. 당시 공사로 인해 강변의 나무들은 모두 잘려나갔고, 물고기들의 보금자리인 웅덩이도 전부 메워져서, 이들이 살아갈 공간이 없는 황량한 하천으로 변해버렸다. 하천의 생태계를 고려하여 보다 친환경적인 공법을 사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한 번 파괴된 생태계를 다시 살리려면 몇십, 몇 백 년의 세월이 걸릴지 모른다. 아마도 앞으로의 나의 일생 동안 영천강에서 황어나 은어, 쏘가리 등을 구경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런 물고기들이 사라짐과 더불어 영천강에 대한 나의 추억도 점차 희미해져 간다.

강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인 물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며, 이는 우리에게 더없이 슬픈 현실이다. 더 이상 강물의 오염을 막고 생태계를 회복시키는 일에 착수하지 않으면 강은 더욱 황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우리 후손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는 인간도 살아남을 수 없다.

오늘도 시골집 창고에서 삭아가고 있는 투망과 녹슬어 가는 낚싯대를 보며 옛날 영천강에서의 추억에 잠시 잠겨 본다.


글 : 2015. 3. 15. 사진 : 2017.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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