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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한 생명력-머위

by 여송

머위는 우리나라 농촌의 밭둑이나 돌담 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이다. 이 종(種)은 습도가 높고 약간 그늘진 곳을 좋아하는 다년생 식물이다. 머위는 암수가 딴 몸으로 자라며, 이른 봄 땅 속에서 줄기가 솟아오르면서 꽃을 피운다. 수꽃은 옅은 노란색이며, 암꽃은 흰색을 띤다.


머위는 우리 주위에 흔하기에 보통 자연적으로 자라난 것을 채취하여 식용으로 사용해 왔으나, 요즘에는 농가에서 직접 재배하여 수확하기도 한다.



때로는 주인이 도시로 떠나버려 폐가가 된 화전민의 외딴집이나, 깊은 산속의 절터에서 집주인이나 스님들의 훌륭한 식재료로 사용되었던 머위가 주인 잃은 채 자생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모습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이 발길이 뜸한, 깊은 산속에서 외로이 자란 머위일수록 그 향기는 더욱 진하다.


자생하는 식물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머위는 병충해에 강하고 가뭄을 잘 타지 않아 아무데서나 잘 자라며 사람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밭에서 농부들이 재배하는 농작물에는 진딧물이나 무당벌레와 같은 해충과 탄저병 같은 병균들이 달라붙어도 머위에는 이들 병해충들이 얼씬거리지도 않는다. 또한 머위를 채취하여 냉장고에 넣어 두면 보름 정도까지는 상하지 않고 싱싱하게 보관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머위가 가지고 있는 쓴맛과 아린 맛 등이 살균이나 살충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머위는 분명 인간의 몸에 이로운 천연물질을 함유하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이러한 나의 신념이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구명(究明)되기를 바랄 뿐이다.

머위는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오랜 기간 동안 그 생명을 유지하면서 자라난다. 이는 소나무나 대나무 같은 연중 푸른빛을 띠는 상록수를 제외하고, 일 년 중 가장 오랜 기간에 걸쳐 생존하는 식물 중의 하나이다. 이 생물체는 이른 봄부터 싹을 틔우는데, 어릴 때는 줄기와 잎이 빨간빛을 띠다가 자라면서 점차 연녹색으로 변해 간다. 여름이 되면 머위는 잎과 줄기가 최대로 자라게 되고 그 색깔도 짙은 녹색을 띠게 된다. 그러다가 늦가을 서리가 내리면 어른 얼굴만큼 넓게 자란 잎과 우산살처럼 곧게 뻗은 줄기도 이내 시들어 버리면서 지상에서의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그는 춥고 긴 겨울 동안 땅속의 뿌리로 생명을 유지한 채, 다음의 따뜻한 봄날을 기약한다. 머위의 이러한 끈질긴 생명력 역시, 다른 식물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특정의 성분들을 함유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머위는 얼핏 보기에는 취나물의 일종인 곰취와 비슷하게 생겼다. 어릴 때는 줄기나 잎이 붉은빛을 띠는 것이 닮았고, 그 모양도 비슷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곰취는 잎 가장자리가 톱니처럼 뾰족한 데 비해, 머위는 다소 밋밋한 점에서 차이가 난다. 어떤 사람이 시장에서 파는 곰취를 보고 시골 동네에서 많이 보던 나물이라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이는 머위와 혼동한 것이다. 자연산 곰취는 해발 1,000미터 정도의 고산지역에서만 자란다.

내가 살던 시골집 뒤편에는 커다란 뽕나무가 서 있었고, 그 아래에서는 머위가 자라고 있었다. 어렸을 적에는 잎이 넓적한 저 풀이 무엇인지 의아해하기도 했으나, 어머니가 가끔 이것을 뜯어 와서 데친 다음, 쌈의 재료로 밥상에 올리는 것을 보고는 이것이 먹는 풀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세월이 흘러 옛 집을 헐고 새 집을 짓게 되었는데, 나는 머위에 대한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집 뒤꼍의 머위 뿌리를 파서 집 앞 밭둑에 심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집 앞 밭둑은 머위 밭이 될 정도로 그 세력을 확장하였다. 머위는 뿌리가 뻗어 나가면서 번식하는데, 그 번식성이 강해 옛날부터 ‘밭을 버리려면 머위를 심어라’ 하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집 앞의 머위는 주말에 가끔 고향집을 방문하는 나에게 아주 요긴한 식재료로 쓰인다. 우선 초봄이 되어 머위 싹이 돋아날 때면 이 싹을 뜯어 살짝 데친다. 너무 오래 삶으면 머위가 풀떼기처럼 흐물흐물해지므로 주의하여야 한다. 데친 머위는 찬물에 담가서 쓴 맛을 우려내어야 하며, 오래 우려낼수록 그 맛이 순해진다. 건져낸 머위는 물기를 짠 후 식성에 따라 초고추장에 버무리거나 된장을 넣어 무치면 맛있는 머위 나물이 된다. 머위는 봄에 올라오는 첫 물이 가장 부드럽고 순하며 그 향기도 강하다.



날씨가 따뜻해져 머위가 성장할수록 그 잎과 줄기는 억세어진다. 보통 5월이 되면 머위는 더 이상 나물로는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거칠어진다. 이때는 잎과 줄기를 데쳐 쌈 재료로 이용하며, 데치는 요령과 쓴 맛 우려내는 방법은 나물 만들 때와 동일하다.


한여름이 되어 머위가 최대한으로 자라면 머위는 쌈으로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억세어진다. 이런 경우에는 머위 줄기만 잘라 껍질을 벗긴 다음, 볶아서 나물로 먹거나 들깨죽이나 장어국 등의 부재료로 사용할 수 있다. 들깨죽에 머위 줄기를 넣으면 머위 특유의 향과 아삭한 식감을 느낄 수 있어 가장 잘 어울리는 궁합이라 할 수 있다. 예전에는 더운 여름날, 차갑게 식은 들깨죽 한 그릇은 맛이나 영양 면에서 나무랄 데 없는 한 끼 식사였다. 특히 모내기철에는 머윗대와 감자, 미역을 넣고 끓인 들깨죽은 빠지지 않는 음식이었다. 여자들은 허리를 굽혀 농부가를 부르면서 모를 심고, 남자들은 못 짐을 져다 나르는 고된 작업을 하느라 지치고 허기져 있을 때, 논 주인이 가져다주는 들깨죽과 막걸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반가운 선물이었다. 때로는 도심의 분위기 있고 값비싼 고급식당에서 음식을 먹으면서, 예전 시골에서의 이런 음식들을 떠올리며 소위 말하는 효용의 크기를 비교하곤 하는데, 아무래도 후자가 크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여서 부나 권력이 행복의 절대적인 척도가 될 수는 없으며, 결국 주어진 환경에서 최대한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더 보람된 삶을 영위하는 것임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옛날의 전통 음식에 더 관심이 가는 것은 나만의 현상이 아닐 것이다. 나는 아직도 머위 줄기가 들어간 예전의 쌉싸름한 들깨죽 맛이 그리워, 몇 평 되지 않는 텃밭에 해마다 들깨를 심는다. 작년에 수확한 들깨 너덧 되는 지금 창고에서 여름철 되기만 기다리고 있다. 집 앞의 머위도 햇살이 뜨거워질수록 그 줄기에 머위 향을 농축시킬 것이다. 그 맛을 즐기기 위해 한여름 들깨 봉지를 들고 재래시장의 방앗간을 방문해, 껍질을 제거한 들깨가루를 만들어 오는 수고쯤은 기꺼이 감수할 것이다.

사람의 입맛이란 대개가 비슷한 모양인지, 작년 초여름에 시골집을 방문한 손님에게 등심 숯불구이 후식으로 가벼운 들깨죽을 내어 놓았다. 그중 한 사람이 하는 말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죽은 처음 먹어본다고 했다. 삼천포에서 구입한 싱싱한 바지락조개와 주꾸미, 멸치를 우려내어 만든 육수에 직접 재배한 들깨가루와 집 주변에서 채취한 죽순, 머윗대에다가 미역, 감자까지 넣었으니, 세상에서 보기 드문 들깨죽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또 다른 주된 재료인 쌀가루는 멥쌀이 아닌 찹쌀을 사용했기에 입에 짝짝 달라붙는다는 그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도 그분을 만나면 그때의 들깨죽에 관한 이야기를 하곤 한다.


머위는 우리 집 주위에서 일 년 가까운 오랜 기간 동안 생존하면서 나에게 수시로 싱싱하고 향기로운 먹거리를 제공해 주는 고마운 존재이다. 더구나 이 식물은 인간으로부터 아무런 보살핌을 받지 않고서도 기꺼이 자신을 요리의 재료로 바친다.


머위는 또한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면면이 삶을 유지해 온 점이, 가난과 외세의 침략에도 굴하지 않고 국가와 민족의 역사를 이어온 우리 조상들과 닮았다. 그래서인지 집 앞의 밭둑에서 자라는 머위를 보면 다른 식물보다 친근감이 생긴다.



오늘도 집 앞의 머위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무심히 바라보기가 일상인 이 고마운 존재에게 모처럼 감사의 마음이라도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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