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바다는 스산하다. 한여름 울긋불긋한 파라솔과 늘씬한 몸매의 젊은이들로 꽉 찼던 해운대 해수욕장도 황량한 바닷바람에 인적이 끊겼고, 간간이 창공을 가로지르는 갈매기의 끼륵끼륵 울음소리만 고요한 겨울 바다의 정적을 깨뜨린다.
남쪽으로는 대한 해협의 거친 파도가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받아 은빛의 물결로 부서져 내리고, 저 멀리 수평선 끝자락에는 낮은 구름이 드리워져 있다. 맑은 날이면 아파트 거실에서 대마도를 볼 수 있는데, 오늘은 시야가 흐려 그곳을 보는 건 불가능하다. 일본명 쓰시마인 이 섬은 부산서 불과 50여 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한 시간이면 닿을 수 있으며, 일본 본토보다는 우리나라에 더 가깝다.
부산과 일본 규슈 사이에 위치한 대한해협, 그러나 우리에겐 이 단어보다는 현해탄(玄海灘)이라는 용어에 더 익숙하다. 1905년 9월 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를 잇는 최초의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 이키마루(壹岐丸)가 취항한 이래, 이 바다는 많은 사람들과 희로애락을 같이 해왔다. 일제 강점기, 조선 침략을 위한 일본인들이 연락선을 타고 이 바다를 건너 부산항에 첫 발을 내디뎠으며, 먹고 살길을 찾아 조선을 떠나는 노동자와 보다 넓은 지식의 습득을 위해 유학을 떠나는 학생들에게 현해탄은 일본으로 향하는 길목이기도 했다.
현해탄은 "검은 바다의 여울"이라는 뜻이다. 여울은 강이나 바다의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세게 흐르는 곳을 의미한다. 현해탄은 필리핀에서 북상하는 쿠로시오 해류의 일부가 대마도 쪽으로 분리되면서 발생하는 쓰시마 해류로 인하여 물살이 거세고 파도가 높기로 유명하다. 한일합방 이후 수많은 조선인 징병자나 노동자, 그리고 꽃다운 나이의 위안부들이 이 거친 바다를 통해 일본으로 강제 동원될 때, 그들에게 이 바다는 절망과 체념의 검은 바다였을 것이다. 따라서 현해탄은 우리 민족이 품었던 애환이 서려 있는 바다이고, 우리의 불행한 과거를 말없이 지켜본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일제 치하에서 해방된 지 70여 년이라는 세월이 지났건만, 우리는 아직도 일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었다고 할 수 없다. 이전에 비하면 그 정도가 줄어들었지만, 경제적으로는 부품이나 소재 등 산업계 전반에서 일본에 의존하고 있으며, 사회적으로는 일본문화의 잔재가 아직까지 우리의 여러 곳에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현해탄이라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유명한 사건이 있었으니, 지금으로부터 90여 년 전인 1926년 8월 4일 새벽 4시경,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으로 항해하던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가 대마도 섬 옆을 지날 즈음,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한 사건, 이른바 김우진-윤심덕 투신자살사건이 그것이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성악가였던 윤심덕과 전라도 만석꾼의 아들이자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인텔리 계층의 김우진의 동반자살은 암울한 일제시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고민하던 두 젊은 청춘남녀의 비극적인 러브스토리라는 점에서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그녀가 투신하기 직전 일본에서 취입한 "死의 讚美"라는 노래에서는 그녀의 이와 같은 애절한 심정을 절절이 노래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봉건적인 유교사상이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시절, 고향에 처자를 둔 남성과 신여성의 부도덕한 교제는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왔다.
핸해탄의 끝자락인 해운대의 동쪽 해안가 언덕 위에는 초고층 아파트 몇 동이 스카이라인을 해치며 흉물스럽게 서 있다. 본래 이곳은 달맞이 언덕이라 하여 건축물의 고도가 제한되어 있는 곳이다. 그런데도 어느 시점부터 공사가 시작되더니 야트막한 건물들로 해안선을 이루어 지중해의 휴양도시 같은 경관을 자랑하는 이곳에 성냥갑 같은 고층건물이 들어서 스카이라인을 해치고 있다. 원칙이 무너진 사회에서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다. 과연 우리는 황막한 광야를 달리면서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달맞이 언덕 아래, 해운대 해수욕장 바로 옆에는 그 유명한 "엘시티" 건물이 착착 올라가고 있다. 이 건물 역시 태어날 수 없는 존재였지만, 권력과 금력의 검은 거래로 인해 출생한 사생아이다. 100층이 넘는 이 건물이 완공되고 나면 해운대의 아름다운 스카이라인은 또다시 괴물의 그림자처럼 흉측하게 변할 것이다. 검은 바다인 현해탄 옆에 검은 거래로 인한 건물이 자라나고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검은 거래의 주인공은 90년 전 윤심덕이 노래했듯이 쓸쓸한 감방, 험악한 고해(苦海) 옆에서 무엇을 찾으려 하는지 묻고 싶다.
아파트 건너편, 동백섬 입구에는 관광버스가 줄지어 정차해 있고, 그 버스에서는 중국 관광객들이 쏟아져 내린다. 섬 안에는 파룬궁 등 중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사람들이 거의 매일 진을 치고 있다. 해운대의 명물인 이 섬도 중국인들에게 점령당한 지 오래다. 전 세계를 상대로 밀려드는 위안화의 거센 힘에, 우리는 겨우 우리의 삶에만 열중하고 있는 가련한 인생인지도 모른다.
아파트 사이로 난 도로에는 외제차들이 줄지어 달리고 있고, 해변을 따라 늘어선 건물마다 외국계 패밀리 레스토랑과 커피점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모두들 살기 힘들다고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푸념이 외제차량의 엔진 소리와 유흥가의 휘황찬란한 불빛에 묻혀 사라진 지 오래다. 우리는 "死의 讚美"에서처럼 허영에 빠져 날뛰면서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길 건너편, 현해탄의 거센 파도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방파제를 따라 조성된 영화의 거리에는 젊은 청춘남녀들이 팔짱을 끼고 걷고 있다. 예전의 남녀 간 사랑이 천천히 오랫동안 지속되는 장작불 같은 사랑이라면, 요즘의 이성간 사랑은 순식간에 타오르면서 쉽게 꺼지는 가스불 같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세대들은 그 옛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거친 바다에 거침없이 몸을 던졌던 윤심덕과 김우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쉽게 사랑하고 쉽게 헤어지는 인스턴트적인 사랑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윤심덕은 세상의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조상들이 일본으로 강제로 송환될 당시의 절망과 체념 속에서 보았던 검은 바다가, 오늘날에는 허영과 기만으로 가득 찬 우리의 인생 때문에 검게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는 갈수록 혼란해지고, 우리의 경제는 퇴보해 가는 현실에 처해 있다. 우리가 각성하지 않으면 우리는 또다시 제2의 한일합방이나 병자호란 같이 일본이나 다른 외세에 종속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가치관이 올바로 정립되지 못하고, 삶에 있어서 성실성이 결여된 우리 자신으로부터 유래한 결과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보다는 자신의 권리를 더 주장하고, 자기가 노력한 이상의 대가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뒤돌아보아야 한다.
갈수록 각박해지는 인심과 도덕적, 윤리적으로 타락해 가는 현 세태를 보며 현해탄의 차갑고 깊은 물속에서 잠들어 있는 두 남녀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들의 행동도 도덕적인 측면에서는 문제가 있겠지만, 그들은 사랑에 있어서만은 죽음을 초월할 정도로 진지하고 엄숙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삶이라는 고난의 가시밭길을 가는 가련한 인생이며, 신이 만든 무대 위에서 춤추는 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현해탄은 저 멀리서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