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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송 Aug 13. 2017

다시 잡은 자전거 핸들

  지구 상에 인류가 등장한 이래, 이들은 수시로 이동해야 했다. 원시인들은 때로는 수렵을 위해서, 때로는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맹수 등을 피해서, 혹은 혹독한 추위나 더위를 피해서 끊임없이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이동은 생존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행동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의 인류 역시 이동이 불가피하다. 숲 속에서 먹잇감을 찾는 대신, 직장이라는 곳에서 돈을 벌어 먹잇감 등 생필품을 사기 위해서는 출퇴근 등의 이동을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여행이나 사교, 레저 등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현대인들은 원시인보다 훨씬 많은 이동을 필요로 한다.

  이동을 위한 수단으로 원시인들은 전적으로 발이나 다리 등 인체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오랜 기간 지속되어 오다가 불과 몇 천 년 전에 이르러서야 가축이나 마차 등 인체 이외의 다른 이동수단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초창기의 이동수단은 당시에는 획기적인 것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의 이동 수단에 비하면 원시적이고 초보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동수단의 한 가지인 자전거는 비교적 최근에 등장했다. 오늘날의 자전거처럼 체인과 공기타이어가 장착된 자전거는 1800년대 후반, 영국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고 하니(왕연중, 발명상식사전, 2012. 1. 10, 박문각), 그 역사가 불과 100년 남짓밖에 되지 않은 셈이다.

  자전거의 역사가 이처럼 짧은 것은, 단순해 보이는 이 기구도 나름대로 과학과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압축공기가 타이어 내부로 주입된 후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기술이나 이에 필요한 장비, 페달을 앞으로 밟을 때에만 동력이 전달되는 기술이나 부품은 근래에 와서야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이 기술들의 원리는 다소 복잡하여 여기서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 외에 자전거 바퀴에 붙어 축과 바퀴의 테두리를 이어주는 "살대"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살대는 강철의 재질로 만들어져 바퀴 가장자리 금속으로 된 테두리 즉, 림(rim) 부분에 나사로 고정되어 있는데, 이 나사를 돌려서 장력을 조절할 수 있다. 각 살대의 장력이 일정하지 않으면 림이 휘어 원형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림이 파손되기도 하고 자전거의 승차감도 좋지 않게 된다.

  이동수단으로 인기를 끌던 자전거가 자동차 등 다른 이동수단의 발달에 따라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자전거가 최근, 운동기구나 레저용으로 그 용도를 바꾸어 다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돌고 도는 것이 인생살이라 하듯이 자전거도 예외가 아니다.

  나 역시 어린 시절에는 이동수단으로 자전거를 이용했다. 중학생 시절 무렵, 처음으로 자전거를 타기 시작해서 부모님의 심부름이나 시장 보러 가는 용도로 자전거를 가끔 이용했다. 당시만 해도 자전거는 한 마을에 몇 대 뿐일 정도로 귀했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 자전거는 이동수단으로써의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집에서 약 10km 떨어진 학교까지 자전거로 통학을 하였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교통수단이 여의치 않아, 등교를 위해서는 걸어서 2km정도 떨어진 기차역으로 가서 통학열차를 타고 10 여 km를 달린 후, 다시 2km의 도심을 걸어가야 학교에 닿을 수 있는, 길고도 시간이 많이 드는 등교 코스를 이용해야만 했다. 버스도 있긴 했으나 배차간격이 길고, 소형버스(당시에는 마이크로버스라 불렀음)라 항상 초만원에다가, 나같이 키가 큰 사람이 서면(엎드리면?) 엉덩이가 천장에 닿을 지경이어서 이용하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자전거를 한 대 사달라고 아버지를 졸랐다. 위험하다며 걱정하시는 아버지로부터 간신히 허락을 얻어 새 자전거를 한 대 얻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새 자전거를 타고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등교하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날씨가 추운 겨울철에는 찬바람에 손발이 시려 군화와 군용 벙어리장갑을 끼고 등교를 하였다. 선생님들도 이러한 나의 사정을 알고 신발과 장갑에 대해 묵인해 주었다.

  당시에는 별생각 없이 타고 다니던 자전거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기 짝이 없다. 비록 지금보다 통행량은 적었지만 수시로 지나치는 차량들 사이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것은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니다. 시내 입구 강변도로에는 까마득한 절벽이 있는데, 이 근방을 지나갈 때는 오금이 저려 오기도 했다. 무더운 여름, 등굣길에 재주 부린다고 핸들에서 두 손을 떼고 내리막길을 내려가다가 길가의 코스모스 꽃밭에 처박혀 하얀 상의와 쑥떡 색 하의 교복을 코스모스 꽃무늬로 장식한 적도 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 보면 때로는 고장이 나기도 한다. 고장이 발생하면 응급조치로 수리를 하든지, 그것도 불가능한 경우에는 수리 센터에 가서 수리를 해야 한다. 고장으로 인해 학교에 지각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말썽이 펑크이다. 이때에는 별 수 없이 자전거를 끌고 가서 수리를 해야 한다. 펑크 난 자전거를 그대로 타고 다니면 바퀴 속의 튜브가 찢어지거나 바퀴의 림이 휘는 치명적인 손상이 뒤따른다. 이 외에도 체인이 벗겨지거나 핸들이 비뚤어지는 등 사소한 고장도 자주 발생하였다. 자전거의 구조나 부품, 그들의 작동원리는 모두 나 스스로, 혹은 수리 센터에서 수리하면서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이다.  

  자전거 통학으로 인해 얻은 것도 많다. 자전거 타기 자체가 운동이므로 별도의 운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때 다져진 하체의 근육은 아직도 생생하다. 복잡한 버스나 기차를 타면서 받는 스트레스 대신 자전거로 들판을 달리면서 얻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는 덤이다.

  대학 진학과 함께 이용이 중단되었던 자전거는 그 이후로도 전혀 이용하지 않았다. 아니, 이용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자가용의 보급으로 자전거는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몇 년 전, 고향집 뒤의 철도가 폐선되고 그 자리에 자전거 전용도로가 생겼다. 주말이면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이 길을 쌩쌩 달린다. 이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불현듯 옛 추억이 떠올라 자전거를 타고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새 자전거를 사서 탈 정도의 욕구는 아니어서 도심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버려진 자전거 한 대를 가지고 왔다. 이 자전거는 앞뒤 타이어 모두 바람이 빠져 운행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도회지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고장이 나면 수리하는 곳이 없어 그대로 방치하다가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방치된 자전거를 몰래 가져가는 것도 절도죄에 해당되는지 몰라 CCTV를 피해 간신히 차에 싣고 나왔다.



  다행히 고향집에서 조금 떨어진 읍내에는 연세가 지긋한 분이 운영하는 자전거 수리점이 아직도 영업을 하고 있다. 가지고 온 자전거를 보여 주니 앞 타이어의 펑크는 때우면 되고 뒷바퀴의 타이어는 통째로 갈아야 한단다. 수리비용은 대략 42,000원 정도 들 것 같다고 했다. 수리비용이 새 자전거 값과 거의 비슷하다고 투덜거리니 이 자전거는 고급자전거라 하면서 수리를 권하는 듯하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들고 나온 자전거가 그중 좋은 자전거라 하니 다소 위안이 되었다.


 

 수리가 끝난 자전거를 타고 고향집으로 향한다. 이 길은 기차 통학 당시 역으로 가기 위해 걷던 철길이다. 학교가 위치한 곳과 반대편에 기차역이 있어 걸어서 갔던 길을 기차를 타고 되돌아온 다음, 고향마을을 지나가야 했던 지겨운 길이었다. 그 철도의 레일은 걷히고 자갈은 다져진 후, 깔끔하게 포장되어 자전거 전용도로로 다시 태어났다. 기차가 다니던 철로를 따라 오늘을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옛날에는 공부하러 학교에 가기 위해 탔던 자전거가 오늘은 레저용으로 둔갑했다. 수십 년의 세월이 빚어낸 변화이다. 등교시간에 쫓겨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도록 페달을 밟던 다리에 오늘은 여유가 있다. 기적소리 대신 휘파람 소리가, 기관차의 엔진 소리 대신 자전거 옆으로 스치는 바람소리가 철도, 아니 자전거 도로 주변의 들판에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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