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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송 Oct 15. 2017

가을에 피는 야생화

  좀처럼 물러설 것 같지 않던 무더위의 위세도 자연의 이치 앞에서는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날씨가 계속되면서 주위에는 가을의 색깔이 완연해졌습니다. 하지만 가는 여름이 아쉬운 듯 한낮에는 따가운 햇볕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 봐야 조만간 드높은 푸른 하늘과 시원한 가을바람에 그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하겠지요. 자연의 일부인 인생살이도 이러한 자연의 순리를 거스를 수 없는 것, 한 세대가 자라나면 다른 세대는 물러나기 싫어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는 법입니다.

 

  산비탈의 황폐된 밭에서는 개망초가 군락을 이루며 아직까지 꽃망울을 달고 있고, 그 옆에는 주인 잃은 폐가가 흉물스럽게 서 있습니다. 이 꽃은 이름 그대로 나라가 망할 때 피는 꽃이라는 뜻의 "亡草"에다가, 질이 떨어지거나 정상적인 것과 흡사하지만 다르다는 뜻을 지닌 "개"라는 접두사까지 붙은 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이 꽃에 대해 얼마나 비천(卑賤)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는 이름입니다. 구한말 외국으로부터 들어와 우리나라 땅에 퍼진 이 꽃은 당시 나라를 잃은 우리의 비참하고 슬픈 역사를 상징하는 꽃입니다. 억척같은 삶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이 집주인은 고달픈 농촌 생활을 등지고 도시로 향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개망초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문전옥답을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조상들의 인생사도 말해 주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파옵니다.


 

  밭둑 아래에는 강아지풀이 가을바람에 흔들거립니다. 조 이삭같이 생긴 열매가 강아지 털처럼 부드러운 털로 뒤덮여 있어서 붙은 이름 같습니다. 가난한 농촌 아이들은 이 풀을 뜯어 장난감 삼아 가지고 놉니다. 그들이 이 열매를 따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혀를 끌끌 차면서 "오요, 오요" 소리를 내면 신기하게도 이 열매는 꼬리를 흔들면서 주인의 품에 안기는 강아지처럼 아이 쪽으로 굴러갑니다. 그러다가 이 놀이에도 싫증이 나면 아이들은 열매 부분을 세로로 쪼개어 V자 형태로 찢은 다음 코밑에 붙입니다. 콧수염을 붙이고 뒷짐을 진 채 "어흠, 어흠" 하는 아이들은 영락없는 어른 아이입니다.

 

 

  산허리를 휘감고 흐르는 개울가 언덕에는 노란 달맞이꽃이 피었습니다. 어느 요절한 가수가 부른 노래의 노랫말처럼 이 꽃은 달 밝은 밤이 오면 홀로 피었다가 아침이 되면 시들어 버립니다. 새파란 달빛 아래에서 고개를 숙인 채 쓸쓸히 미소를 띠면서 밤을 새는 이 꽃은 한 많은 인생을 살다 간 우리네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꽃 아래 줄기에는 벌써 열매가 맺혔습니다. 열매 속의 기름은 어머니의 한과 눈물의 결정체입니다.


 

  개울 옆 습지에는 여뀌가 하얀 꽃망울을 터뜨렸습니다. 요놈은 생김새도 추하고 맛도 매워 송아지도 먹지 않습니다. 해질 무렵, 망태기 메고 꼴 베러 간 아이들에게서도 이 풀은 선택받지 못했습니다. 아무 풀이나 가리지 않고 잘 먹어대는 누렁이에게도 외면당했으니 그 마음 오죽할까요? 실망스러운 마음을 꽃으로나마 위로받으려 하는 것 같습니다.


  사립문 옆 공터에는 까마중 열매가 까맣게 익었습니다. 말 만한 처녀들은 심심하면 이 열매를 따다가 바늘로 열매 속의 씨를 꺼낸 다음, 껍질로 꽈리를 불곤 했습니다. 섬세하면서도 긴 시간을 요하는 이 작업은 처녀들이 마음속으로 사모하는 이성에 대한 집념의 다른 표현입니다. 꽈리가 완성된 후 처녀들이 부는 꽈리 소리는 동네 총각에 대한 말 못 하는 그리움을 나타내는 세레나데입니다.

 

  할머니가 혼자 기거하는 토담집 담장 아래에는 쇠무릎이 뾰족한 꽃받침을 터뜨리더니 그 사이로 꽃잎이 비집고 나옵니다. 자그마한 꽃잎은 연한 녹색을 띠었고, 부끄러운 듯 꽃받침 사이로 자신을 숨깁니다. 나중에는 이 꽃에서 맺힌 열매가 할머니의 치맛자락에 달라붙어 다른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어리광을 부릴 것입니다. 꽃을 받치고 있는 꽃대에는 할머니의 아픈 무릎처럼 둥그렇게 생긴 마디가 여러 개 붙어 있습니다. 농부들이 이 꽃을 뽑으려고 하면 마디 부분이 떨어져 나가면서 뿌리를 보호합니다. 쇠무릎은 후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 온 우리의 조상을 닮았습니다. 땅속에 묻힌 이 꽃의 뿌리는 결국 할머니의 무릎 병을 고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것입니다.


  마을 건너편, 야트막한 양지쪽 산기슭에는 구절초가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인적이 끊긴 산중에 보아주는 이도 없이 외로이 피어 있는 모습이 측은하기 그지없습니다. 어쩌면 이 꽃은 수많은 인파와 풍요로운 물질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잃고 외로이 방황하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닮은 것 같아 가슴이 아려옵니다.

 

  반대편 산기슭의 응달에는 상사화가 붉게 불타고 있습니다. 꽃이 필 때 잎은 없고, 잎이 자랄 때는 꽃이 피지 않으므로 서로 볼 수 없는 운명을 가진 꽃입니다. 이 꽃은 서로를 그리워 하지만 만날 수 없어, 숨바꼭질 같은 사랑을 해야만 하는 연인을 닮았습니다. 먼 옛날,  한 여인이 이루지 못하는 사랑에 홀로 애태우다 죽은 후 그 넋이 이 꽃으로 피어났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옵니다.


  들판을 가로질러 쭉 뻗은 신작로 주위에는 코스모스가 한들거립니다. 이 꽃은 이름까지 외국에서 들어와 우리나라에 터를 잡은 귀화식물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이 꽃씨를 채집해 와서 주위에 심는 것이 숙제일 정도로 부지런히 퍼뜨린 결과, 이젠 우리 주변에 흔한 꽃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가꾼 꽃이기에, 우리네 산과 들판에서 자생하는 그야말로 야생화라는 이미지와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꽃 모양에 있어서도 키가 크고 색깔도 화려해 가냘프고 소박한 우리의 야생화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코스모스의 등장과 함께 키, 코크고 노란 머리의 서양 사람들도 우리 주위에 흔하게 볼 수 있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요? 이런 사람들이 이 땅에 산다고 해서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듯이, 이 꽃이 우리 주변에 저절로 자라난다고 해서 우리의 야생화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요?


  나는 화려하고 향기로운 봄 야생화보다는 수수하고 꾸밈없는 가을 야생화를 더 좋아합니다. 봄 야생화가 화사하게 차려입은 젊은 새댁 같은 꽃이라면, 가을 야생화는 세월의 모진 풍파를 겪어 오면서 인생을 달관한 중년의 여인 같은 꽃입니다. 봄꽃의 강렬한 항기는 곧 후각세포를 마비시키고 화려한 자태에는 곧 싫증을 느끼게 되지만, 청초하고 단아한 가을 야생화는 보면 볼수록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魔力)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을 녘 우리의 산하에 외롭고 쓸쓸히 피어 있는 야생화는 모진 생활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삶을 이어온 우리 조상들의 넋이 담긴 꽃입니다. 이러한 가을 야생화에 더 정이 가고 동경하게 되는 우리 또한 조상의 피를 이어받은 우리 민족의 후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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