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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송 Oct 29. 2017

벼에 대한 애도(哀悼)

  가을이라 하지만 흐리고 간간이 비가 내리는 장마철 같은 날씨가 계속되더니, 어느 날 갑자기 기온이 급강하하면서 바로 겨울 같은 날씨로 접어든다. 세상이 하도 어수선하니 날씨마저 변덕을 부리는 건지 아니면 봄이나 가을이 실종된 건지 모를 일이다. 여하튼 계절의 변화도 예전 같지 않아 봄이나 가을이 짧아지고 여름과 겨울이 길어진 것만은 틀림없는 듯하다.

  날씨가 추워졌지만 들판에는 아직도 추수를 하지 못한 논이 많이 보인다. 아직 벼베기를 못한 이유는 탈곡을 한 벼를 아스팔트 길가에서 건조시키는 작업이 불편하여 논에서 벼를 바짝 말린 다음에 추수를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편리함의 대가로 쌀의 질이 떨어져 밥맛이 없어진다는 반대급부를 요구한다. 세상일이란 모두 마찬가지여서 어떤 대가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르는 법이다.

  어쨌든 황금빛 벼이삭이 가을(?) 바람에 일렁이는 것을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은 부유하기 그지없다. 배고픔은커녕 배 나옴을 걱정하여야 하는 요즘 사람들에게도 풍요롭게 보이는 이 풍경이 배고픔이 일상생활이었던 옛 조상들의 눈에는 얼마나 풍족한 모습이었겠는가? 이런 결실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농부는 봄부터 가을까지 자기 자식 키우듯 벼를 돌보아왔던 것이리라.

  벼를 수확하기까지는 많은 작업과 비용을 요구한다. 농부는 우선 이른 봄부터 보온못자리를 만들어 볍씨를 파종한다. 초여름에는 논을 갈고 물을 대어, 못자리에서 다 자란 모를 논에다 옮겨 심는 모내기를 한다. 모내기는 한때는 동네의 장정뿐만 아니라 부녀자들까지 총출동해야 하는 핵심적인 농사일이었으나, 요즈음은 기계화가 진행되어 수월하게 끝내 버린다. 벼가 자라 감에 따라 농부는 수시로 생육 상태를 관찰해야 하며, 그에 따라 적절한 물관리, 거름주기, 병충해 방제와 제초작업 등을 수행해야 한다. 장마철, 고온다습한 기후는 벼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긍정적인 역할을 함과 동시에, 각종 병해충들도 증식하기 쉬운 환경을 제공하는 부정적인 역할도 수행한다. 따라서 이 시점의 벼농사가 가을의 작황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열심히 돌본 벼가 때로는 이화명충에 줄기를 갉아 먹히면 농부는 자기 몸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끼며, 다 자란 벼 잎이 흰빛잎마름병에 걸려 말라 오그라들면 그의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과 같은 비탄에 잠기게 된다. 인간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 이러한 인고(忍苦)의 세월을 이겨낸 농부만이 가을철 추수의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추수를 한 후에도 우리의 주식(主食)인 밥이 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추수 후에는 건조작업이 필수적이다. 아무리 벼이삭의 상태로 논에서 말린다 해도, 탈곡 후 건조기로 건조하거나 도로변에서 햇볕에 말리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농가의 주 소득원인 벼 수매에 응하기 위해서는 벼의 수분 함량이 일정 수준 이하여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농가의 식량으로 벼를 보관하는 경우에도 부패나 좀벌레 등의 해충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추가 건조는 해야 한다. 건조된 벼는 정미소나 가정에서 정미기로 도정을 해야 최종단계인 쌀을 얻을 수 있다.   

  사실 우리가 밥을 배불리 먹게 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저조한 쌀 수확량, 낮은 소득수준에 다른 먹거리도 없는 상황 하에서 시골서 농사짓는 사람조차도 쌀밥을 실컷 먹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 통일벼 품종의 개발로 벼 수확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나면서 식량 상황은 급속도로 나아지기 시작했다. 통일벼는 키가 작아 잘 쓰러지지 않으면서, 수확량은 재래종인 이끼바레나 농림 6호 같은 품종에 비해 1.5배 정도 생산량이 늘어났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통일벼에 벼 낱알이 하도 많이 달려서 우리는 논 어귀에서 벼이삭을 뽑아 낱알을 일일이 세어보기까지 한 적이 있다. 이 품종은 소출이 많다는 장점 대신 밥맛이 떨어진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식은 밥이 되면 돌덩어리같이 단단해져 먹기가 거북했던 기억이 난다.

  1980년대에 와서는 소득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주식(主食)인 밥 대신에 빵이나 다른 식품들로 식사를 해결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쌀 소비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벼농사도 생산량이 많은 통일벼 대신 밥맛이 좋은 벼 품종으로 대체되었으며, 이젠 쌀이 모자라 밥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은 면하게 되었다.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 타결 이후 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하게 되고 쌀 소비가 계속 줄어듦에 따라 쌀 과잉공급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불과 30여 년 만에 상황이 180도 바뀌게 된 것이다. 더구나 최근 들어 양곡관리특별회계의 누적적자가 1조 원을 초과하는 상황에 이르자 정부는 벼 수매가를 인하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대해 농민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애써 수확한 벼를 불사르기까지 하고 있다. 정부로서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진 셈이다.

  벼의 과잉공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선 정부는 쌀 소비 촉진을 위한 여러 가지 시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쌀막걸리나 쌀국수, 쌀로 만든 과자, 빵 등을 개발하였고, 한때는 남는 쌀을 북한에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정책으로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하게 되자, 최근에 와서는 절대농지의 폐지라는 정책까지 고려하기에 이르렀다. 이 정책이 현실화되면 논이 택지나 상업용지로 전용되어, 벼농사를 짓던 농지가 급격히 훼손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수익성을 좇아 행동을 한다는 점이다. 벼 수매가가 낮아지는 등 벼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자, 농민들은 너도나도 벼 재배를 포기하고 있다. 벼를 심던 논을 자갈이나 흙으로 메워 밭으로 만들고, 거기에다가 수익성이 높은 과일이나 채소를 재배하기 시작하고 있다. 약삭빠른 인간들은 주판알을 튕겨보고(요즈음은 계산기를 두드리는가?), 조금이라도 덕이 된다 싶으면 조그만 돌멩이 하나도 없는 기름진 논에 가차 없이 바위나 자갈을 쏟아붓는다.

  벼는 다른 상품처럼 단순히 수요, 공급의 측면에서 고려해서는 안된다. 이는 우리의 주식(主食)이기 때문에 전쟁이나 자연재해와 같은 식량안보 차원의 접근도 필요로 한다. 또한, 한 번 망가진 논을 다시 원상태로 복구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할 때, 일정 수준의 벼 생산량 유지는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벼는 수천 년 동안 우리 민족의 주식(主食)이자 우리 조상들의 얼이 담긴 농작물이다. 조상들은 피땀을 흘려가며 그 논에다가 벼를 심고 재배하여 자식들 먹여 살리고 교육시켜 왔다. 이러한 조상들의 영혼이 담긴 논이 하루아침에 자갈과 흙으로 채워지는 현장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내 심정은 착잡하기만 하다.

  오늘도 시골집 앞 논에서는 집채만 한 덤프트럭들이 드나들면서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문전옥답인 논을 메워 밭으로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다. 조상들이 다시 깨어나 이 광경을 보노라면 기절초풍할 일이다. 구한말 단발령이 내렸을 적에 민초(民草)들은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자기 머리카락 대신 목을 자르라고 했듯이, 아마도 조상들은 이 광경을 보면 덤프트럭 앞에 드러누워서 트럭이 내 몸 위로 지나갈 수 있을지언정, 내 논으로는 지나갈 수 없다고 울부짖을 것이다.

  벼를 심기 위해 수백 년에 걸쳐 우리 조상들이 허리 굽혀가며 돌멩이 골라내고 높은 곳의 흙을 낮은 곳으로 지게로 져다 날라 평평하게 다져 왔던 논, 봄이면 개구리 알 낳고 여름이면 온 들판을 녹색의 벼로 물들이며 가을이면 누렇게 벼가 고개를 숙이고 겨울이면 코흘리개 어린것들이 벼 그루터기를 잔디 삼아 공차기하던 논, 조상들의 삶과 애환이 서려있는 벼를 재배하던 논이 흙과 자갈을 퍼 나르고 있는 포클레인의 무한궤도에 짓밟히는 순간, 조상들의 영혼도 사라지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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