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마다 호박을 심는다. 호박 농사라 해봐야 백 평 남짓한 시골집 텃밭에서, 다른 작물에 우선권을 빼앗기고, 뒷마당 귀퉁이에 고작 2포기 심는 것이 전부이지만, 이 작물은 나의 시골생활에 있어서 물질적, 정서적으로 여러 가지 도움을 준다.
호박을 심기 위해서는 우선 커다란 구덩이를 파야 한다. 다른 작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호박의 경우는 특히 밑거름을 충분히 해야 열매가 크고 많이 열리므로, 구덩이를 깊고 넓게 파서 퇴비나 계분 같은 거름을 잔뜩 채운다. 옛날에는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인분을 가득 채움으로써 호박 농사를 시작했는데, 시골 주택의 화장실도 수세식으로 바뀐 요즈음은 그것이 불가능하므로 농협이나 마트에서 밑거름을 사서 쓴다. 어찌 농작물뿐이랴? 인간 세계에 있어서도 어려서부터 인격이나 교양이라는 밑거름을 가득 쌓은 사람이 나중에 참다운 인간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지역마다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 동네에서는 대개 4월 초에 호박을 심는다. 물론 이 시기는 호박씨를 직접 파종할 때이고, 종묘상이나 농약상에서 싹을 틔운 호박 모종을 구입하는 경우에는 이보다도 다소 늦게 심어도 된다. 어떤 경우든 호박이 일단 착근을 하고 나면 무서운 속도로 자라나기 시작하여, 대략 2~3m쯤 줄기가 뻗으면 호박꽃이 맺히기 시작한다. 이 호박꽃은 줄기 끝부분이 성장해 가면서 그 줄기 끝부분을 따라 늦가을까지 계속 피어난다.
호박꽃은 둥근 원통형의 한 장의 꽃잎과 그 꽃잎 한가운데 붓끝처럼 생긴 꽃술이 솟아난, 그다지 볼품없는 외모를 가진 꽃이다. 그래서 그런지 호박꽃이라 하면 대개 여자의 외모와 관련하여 부정적인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다. "호박꽃도 꽃이냐" 하는 속담은 예쁘지 않은 여자는 여자로 볼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고, "꽃은 꽃이라도 호박꽃"이라는 표현은 못생긴 여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인다. 이러한 부정적 이미지는 호박꽃이 장미나 튤립처럼 모양이나 색상이 화려하지도 않고, 다른 대부분의 꽃들이 가지고 있는 향기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형성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호박꽃은 시골 담벼락 밑에서 아무런 꾸밈없이 피어 있는 청초한 꽃이며,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불평하지 않는 순박한 꽃이다. 그 꽃은 한 번 피면 쉽게 시들지 않고, 꽃이 질 때에는 순식간에 줄기에서 스스로를 분리시켜 맥없이 떨어져 내린다. 장미꽃이 서울의 올드미스김이라면 호박꽃은 강원도 산골의 열여덟 순이라고나 할까?
수밀도(水蜜桃)가 젊은 처녀의 탄력 있는 젖가슴을 연상하는 과일이라면, 호박은 커다랗고 펑퍼짐한 시골 아낙네의 엉덩이를 닮은 채소 열매다. 이 호박에는 복숭아처럼 달콤하고 향기로운 젖과 꿀이 들어있지는 않지만, 힘들고 기나긴 삶을 살아오면서 체득(體得)한 인생의 경험과 연륜이 배어 있다. 복숭아는 여름 한철 꽃 피우고 열매를 맺지만, 호박은 이른 봄부터 늦가을에 이르는 기나긴 시간 속에서 성장하고 성숙한다. 복숭아는 강보에 싸인 갓난아기처럼 종이 봉지에 싸인 채 한여름의 뜨거운 햇빛을 피해가지만, 호박은 맨살로 그 불볕에 맞선다. 그 결과, 복숭아 피부는 부드럽고 색깔이 연한 반면, 호박 껍질은 투박하고 딱딱하다. 복숭아는 연약하여 병해충에 약하지만, 호박은 단단한 껍질로 인해 바이러스나 벌레가 얼씬거리지도 못한다.
이 식물은 천성이 모질고 억세다는 점에서, 고난 속에서도 꿋꿋이 생존해 온 우리 민족의 정서와 많이 닮았다. 꽃이나 열매가 수수하고 꾸밈없는 점은 시골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유사하다. 호박은 이처럼 생명력이 강하기 때문에 성장과정에서 사람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종(種)은 또한 병해충에 강한 식물이기 때문에 농약을 치지 않아도 된다. 이런 점에서 호박으로 만든 음식은 자연식품이라고 해도 된다.
호박은 또한 여름철, 무더위에 잃어버린 입맛을 북돋아 주는 호박잎을 먹거리로 제공한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왕성하게 자란 호박잎을 채취하여 끓는 물에 살짝 데친 다음, 밥 위에 찐 툭툭한 된장과 함께 쌈 싸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이 맛은 도회지의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에서 먹는 피자처럼 니글니글하지도, 비싼 일식집이나 횟집에서 먹는 생선회나 해물탕처럼 비릿하지도 않은 담백한 맛이다. 이 단순하고 소박한 음식은 요리하기도 쉬울뿐더러, 쉽게 상하지도 않아 여름철 메뉴로는 적격이다. 쌈에 사용되는 호박잎은 호박 줄기의 끝부분에 달려 있는 보드라운 잎을 쓰며, 너무 오래 데치면 풀떼죽같이 흐물거리므로 주의하여야 한다.
호박은 자라면서 수시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초여름, 열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애호박을 채 썰어 호박전을 부쳐 먹으면 달달한 맛과 산뜻한 호박 향이 입안에 스민다. 이 애호박이 계속 자라면 가을철에 누렇게 익은 어른(?) 호박이 된다. 다 자란 호박 열매는 호박죽, 호박범벅, 호박떡 등 여러 가지 음식재료로 사용된다. 호박은 초여름에 열매를 맺어 늦가을에 이르는 기나긴 시간에 걸쳐 자라고 익은 것이라야 호박 특유의 향기와 달콤한 맛을 선사하며, 외형적으로 단단하게 여물고 색깔이 진해지면서 맛도 깊어진다. 이런 호박은 표면이 약간 거칠고 껍질에 하얀 분(粉)이 생긴다.
호박은 항암효과 이외에도 저칼로리 식품으로 포만감을 주고, 배설을 촉진하며 혈중 콜레스테롤을 낮춰서 지방의 축적을 막아주는 등 다이어트에도 대단히 좋은 식품이다. 예로부터 산후에 얼굴과 팔다리가 많이 부어있는 임산부가 호박을 삶아 먹으면 부기가 빠지면서 몸이 가벼워지게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이 여성들의 신체와 외모를 건강하게, 그리고 날씬하고 예쁘게 가꾸어 주는 호박이 여성들을 비하하는 속담에 사용되었다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입에 쓴 약이 몸에는 좋다"는 옛 속담은 "다소 볼품이 없는 과일이나 열매가 몸에는 좋다"는 내용으로 변형하여 호박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호박의 씨앗은 단백질과 지방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 이중에 지방은 불포화지방으로 되어 있으며, 머리를 좋게 하는 레시틴과 필수 아미노산이 많이 들어있다. 또 호박씨는 혈압을 낮게 해준다는 연구결과도 있으며, 촌충 구제와 천식치료에도 쓰여 왔다. 이런 점에서 호박은 버릴 것이 없고 여러 가지 영양소와 효능을 갖춘 완전식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호박은 씨앗과 관련해서까지, 겉으로는 점잖고 의젓하나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엉뚱한 짓을 하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뒤로 호박씨 깐다"라고 하면서, 좋지 않은 이미지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집 뒤편에 심은 호박은 최근에 자주 내리는 비로 그 성장세가 대단하다. 하루 사이에 30cm 정도는 자라는 것 같다. 요즘처럼 느지막이 열리는 열매는 끝 호박이라 하여 크게 자라기 전에 따서 식재료로 사용한다. 이 새끼 호박은 호박전의 주재료로, 갈치찌개 등의 부재료로 사용된다.
올해는 초여름의 가뭄과 무더위 때문에 열매는 많이 달리지 않았다. 현재까지 달린 호박은 고작 2개. 작년에는 두 포기에서 6 덩이나 열렸었다. 줄기 끝에 달려야 할 호박꽃도 보이지 않아 끝 호박도 기대하기 어렵다. 알파고 등 첨단 세상에 살고 있다지만 아직까지도 농사는 신의 영역이다.
호박 줄기 끝부분에 달린, 보드라운 호박잎을 여남은 장 땄다. 오늘 저녁 밥상의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할 찬거리들이다. 호박잎은 냄비에 살짝 데치고, 조그만 종지에 된장을 풀어 현미를 앉힌 밥솥에 넣었다. 예전에는 무쇠솥이 했던 일을 요즈음엔 전기밥솥이, 낙엽이나 장작 등의 땔감이 할 역할을 전기가 대신하고 있다.
초여름에 열린 호박 두 덩이는 늦여름 석양을 받아 빛나고 있다. 이 녀석들은 서리가 내릴 때까지 호박 줄기에 붙어서 세월의 흐름을 열매에 켜켜이 쌓아갈 것이다. 늦가을, 날씨가 싸늘해지면, 여름철 뙤약볕 아래에서의 인고(忍苦)의 결과가 농축된 호박 열매를 따서 그 진수를 맛볼 생각이다. 속 깊고 후덕한 맏며느리 같은 이 열매는 호박죽의 주된 식재료이자, "추억의 맛을 찾아서 - 호박죽"이라는 글 재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