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프레스노(Fresno)에서 1년간 체류할 기회가 있었다. 프레스노는 캘리포니아 중부지방에 있는 인구 약 50만의 도시로, 미국 서부여행의 전전기지이다. 요세미티(Yosemite), 세콰이어(Sequoia), 킹스 캐년(Kings Cannyon) 등 그 유명한 국립공원들이 이곳에서 한 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다. 이곳을 방문하는 한국 여행객들도 대부분 프레스노에 숙소를 정한다.
캘리포니아주의 동쪽에는 시에라 네바다(Sierra Nevada) 산맥이 뻗어 있고, 이 산맥을 따라 험준한 산악 지형이 만든 영봉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 많다. 미 본토에서 제일 높은 휘트니 산(Mt. Whitney, 해발 4421m)이 바로 이 산맥에 위치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 내의 가장 높은 곳이 시에라 네바다 산맥보다 동쪽에 위치한 로키산맥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이러한 독특한 지형은 이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환경과 섭생을 만들어내었다.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은 시에라 네바다라는 높은 장벽을 넘으면서 연중 수시로 비나 눈을 뿌린다. 풍부한 강수량은 이 지역의 삼림들의 성장을 돕고 수명을 연장시킨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키가 큰) 나무(하이페리온, 약 115m)와, 가장 오래된 나무(므두셀라, 4800여 살), 가장 부피가 큰 나무(General Sherman Tree)가 모두 이 지역에 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 나무들은 나이도 모두 2, 3천 살 이상이 되는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 정도의 세월을 견디기 위해서는 가뭄이나 산불, 강추위 등의 자연재해가 없어야 하는 등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이 지역의 풍부한 강수량과 온화한 기후 등이 이러한 기록들을 수립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이다.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높은 산맥을 넘으면서 비를 떨어뜨리고 나면 덥고 건조한 대기로 변하여 내륙지방으로 향하게 되며, 이러한 기후가 만들어 낸 지형이 사막이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 동쪽에 위치한 모하비 사막(Mojave Desert), 죽음의 계곡(Death Valley) 등이 그것이다. 이곳은 고지대인 시에라 네바다 산맥과는 반대로, 미국 내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낮은 곳(죽음의 계곡, 해수면 아래 86m)이다. 결국, 미국 본토 내의 최고, 최저지역이 이 곳에 다 있는 셈이다. 고도가 낮다 보니 기온은 높아, 이곳의 여름 최고 기온은 섭씨 40도 이상은 보통이고, 죽음의 계곡에선 50도를 넘기는 경우도 다반사라고 한다.
캘리포니아 중부지역, 시에라 네바다 산맥 서쪽 기슭에 위치한 프레스노는 동쪽에 위치한 높은 산맥 때문에, 내륙 쪽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남쪽의 LA근방으로 가서 15번 고속도로를 이용하거나, 북쪽의 세크라멘도 지역으로 우회하여 80번 고속도로를 타야 한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넘는 도로도 있긴 하나, 노폭이 좁고 험준해서 미국 사람들도 좀처럼 그 위험한 길을 이용하지 않는다.
요세미티나 세콰이어, 죽음의 계곡 등 이곳의 명소는 1997년에도 방문한 적이 있다. 프레스노에 와서 15년 만에 주위의 여러 비경들을 다시 관광했던 우리 부부는, 여름방학이 끝나고 9월에 들어서자 그동안 여행하지 못한 미국 북서부 지역과 캐나다 서남부 지역을 보름 동안 여행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9월을 여행 시점으로 잡은 이유는 8월까지는 여행 성수기라 숙소 잡기도 어렵고 숙박비도 비싸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이 끝나면 미국의 남부 애틀랜타,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 뉴멕시코 등과 북동부의 메인 주, 그리고 알래스카 등 몇 개 주만 제외한 대부분의 미국 땅을 여행해 본 셈이 된다. 1997년 1년 동안 미국에 체류하면서 미 동부와 중부지방, 그리고 서부의 일부 지역을 여행한 바 있다. 미국의 중부지역은 대평원(Great Plains) 지역으로, 밀이나 옥수수 밭이 대부분이어서 볼거리가 없고, 관광지의 대부분이 동부와 서부에 집중해 있다.
9월 1일, 자동차 트렁크에 필요한 짐을 잔뜩 싣고 집을 나서 북쪽으로 향했다. 첫날 목표는 오리건 주 남단에 있는 크레이터 국립공원(Crater Lake National Park). 크레이터는 분화구라는 뜻으로, 이 호수는 우리나라 백두산의 천지처럼 분화구에 물이 고여 생성된 호수이다. 해가 서산으로 기우는 오후 5시경 그곳에 도착하니 거대한 칼데라 호수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 호수의 수심은 592m로 미국에서 가장 깊은 호수이고, 세계에서도 9번째로 깊다고 한다. 호수 주위에 나 있는 도로 길이만도 52km 정도이고, 차로 둘러보는데 걸리는 시간도 2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대한 호수이다.
시간이 늦어 분화구 주위를 차량으로 대충 둘러보고 곧바로 하산하여 계속 북쪽으로 이동한 후, 저녁 8시경 벤드(Bend)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숙박하게 되었다. 숙소를 미리 예약하지 않고 여행하는 경우 제일 어려운 점 중의 하나는 여행하면서 오늘 묵을 숙소를 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경우 대개는 차로 이동하면서 저녁 무렵 도착할 예정지를 지도로 확인한 다음, 각 주별로 발행되는 여행안내책자(tour book) 상의 도착 예정지 지역의 숙소에 전화를 해서 예약하는 절차를 거친다. 때로는 이용 가능한 숙소가 없어 목적지에서 벗어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서 숙소를 잡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사전에 숙소를 모두 예약해 놓고 출발하게 되면, 교통체증 등으로 제때 숙소에 도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예정에 없던 다른 곳을 가보고 싶어도 그것 때문에 일정이 하루라도 늦어지면 모든 예약을 취소하고 다시 예약해야 하는 어려움이 생기게 된다.
둘째 날에는 오리건 주의 최고봉인 후드 산(Mt. Hood, 3429m) 등 여러 관광지를 둘러보고 북쪽의 워싱턴 주로 향했다. 처음으로 본 오리건 주의 특색은 야트막한 야산이 끝없이 펼쳐지는 한가로운 전원풍의 시골이었다. 그러다가 가끔 눈앞에 갑자기 괴물처럼 높다란 산이 나타나곤 하는데, 산 높이가 3,000m가 넘고 정상에는 만년설로 덮여 있다. 후드가 그랬고 워싱턴 주의 레이니어 산(Mt. Rainier, 4392m)도 그랬다.
특이한 점은 이런 산꼭대기에는 스키장이 조성되어 있어 사시사철 스키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환경보호론자의 반대 때문에 설악산이나 지리산에 케이블카도 설치하기 힘든 상황과 대조적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자연은 가급적 그대로 보존했으면 하는 환경보호론자에 가깝지만, 미국은 땅덩어리가 워낙 넓고 높은 산이나 아름답고 웅장한 계곡도 많아, 환경보호보다는 자연을 이용한 휴가나 레저를 즐기는 데 더 비중을 두고 있는 듯했다.
다음 날은 컬럼비아 강을 거슬러 올라 강 건너 워싱턴 주에 진입한 다음, 레이니어 산 정상에 오른 후 다시 내려와 세인트 헬렌스 산(Mt. St. Helens)으로 향했다. 그리 유명하지도 않은 이 산을 방문하고 싶었던 이유는 어렸을 때 화산 폭발로 뉴스에 보도된 것을 본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억 속의 산을 찾아가는 데 대한 대가 치고는 너무도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거기로 가는 길은 울창한 숲 속에 난, 우리나라의 농로 정도의 좁은 길을 따라 4시간 정도 운행해야 하는 난코스였으며, 그곳은 인적이라고는 없고 가끔 곰이나 사슴 등이 숲 속에서 목격되기도 하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힘든 길을 지나 산 입구에 도착하니 자연의 위대함에 고개가 숙여진다. 1980년 5월 18일에 일어난 화산 폭발로 산의 윗부분이 통째로 잘려나갔고, 그 자리에는 커다란 함몰 구멍이 생겼다. 한 순간의 폭발로 산의 높이가 2950m에서 2550m로 400m나 낮아졌다. 57명이 목숨을 잃었고 재산피해도 10억 달러에 이른다고 했다. 산 주위와 아래쪽 호수에는 화산 폭발로 불에 타 죽은 나무들이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여하튼 두 산에 대한 여정이 끝나고 다시 북쪽으로 차를 몰아 워싱턴 주의 서쪽 끝에 위치한 올림피아 반도에 진입하였다. 차 속에서 전화로 예약해 둔 반도 동북쪽 세큄(Sequim)이라는 마을의 숙소에 도착해 보니 반갑게도 한국계 미국인이 운영하는 숙소였으며, 덕분에 우리는 주위의 관광지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다음날 우리는 올림피아 반도에 있는 올림픽 국립공원(Olympic National Park)에 올랐다. 오르는 길 도로에는 사슴 한 마리가 유유자적하게 길을 따라 걷고 있다. 자동차나 사람이 지나가도 아무런 동요 없이 제갈 길 가는 동물들, 그야말로 자연과 인간의 공존 현장이다. 공원 전망대에서 남쪽으로 내려다보니 우리가 올랐던 후드와 레이니어, 기타 해발 3,000m에 가까운 봉우리들이 괴물같이 구름 위로 그 봉우리를 드러내고 있다.
공원 내의 이끼가 잔뜩 낀 원시림, 미 본토 서쪽 땅 끝 등을 관광하고, 공원 내에서 남녀 공동 온천욕을 즐긴 후(수영복은 필수임), 다시 시애틀로 향하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니 길도 구불구불하고 시간도 많이 걸려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올림피아 반도와 시애틀 사이에는 U자형의 바다가 가로막혀 있어 시애틀로 가기 위해서는 남쪽으로 다시 내려가 바다 건너편에서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최소 8시간 정도는 걸릴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여행 일정을 바꾸어 올림피아 반도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 반도 끝 미 본토 서부의 최북단인 포트 앤젤리스(Port Angeles)라는 조그만 항구도시에서 캐나다행 카페리를 타기로 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러한 급작스런 스케줄 변경은 숙소나 관광지에 대한 예약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포트 앤젤리스 숙소에서 밤늦게 노트북 컴퓨터로 카페리 승선을 위한 출국 신청서와 차량 적재를 위한 신고서를 작성하였다. 911 테러 이후 미국에서는 출입국에 대한 심사가 매우 까다로워져, 다른 국가로 여행을 하려면 각종 신청서 작성과 공항이나 항만에서의 검문검색 등 많은 시간과 절차가 필요하다.
캐나다 밴쿠버 섬에서 내려 찾아간 곳은 부쳐트 가든(Butchart Garden). 1904년 Jennie Butchart여사가 채석장에 세운 정원으로, 세계각국을 여행하면서 수집한 꽃이나 식물들로 꾸며져 있다. 프레스노에서 얻은 정보로는 이곳이 천당(1000당) 바로 아래인 999당이라고 했다. 한 여인의 정성이 이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 수 있구나 하는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가든 방문 후 다시 배로 밴쿠버 시에 도착한 다음 거기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3박 4일에 걸친 캐나다 로키 관광에 나섰다. 재스퍼(Jasper), 밴프(Banff), 요호(Yoho) 세 국립공원의 웅장하고 환상적인 경치는 말이나 글로 다 표현하기에 벅차다. 세 공원을 가로지르는 93번 도로를 천상(天上)의 도로라 부르는 이유를 알 만했다. 이 캐나다 로키의 최고봉인 롭슨 산(Mt. Robson, 3954m)을 나의 프로필 사진으로 쓰고 있을 정도다. 이 지역을 여행하면서 느낀 감흥을 담은 여행기는 훗날로 미룬다.
캐나다 로키의 마지막 숙소인 밴프에서 남쪽으로 내려가서 국경을 통과하면 우리가 관광하려고 계획했던 미국의 글래이셔 국립공원(Glacier National Park)으로 바로 도착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서쪽으로 달려 다시 밴쿠버로 돌아왔다. 그 이유는 처음에 계획했던 시애들을 관광하지 못했고, 아울러 한 번도 밟아보지 못했던 몬태나, 아이다호 두 주(州)를 여행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밴쿠버에서 남쪽으로 이동하여 시애틀로 돌아와서 시내를 관광한 후, 90번 고속도로를 타고 다시 동쪽으로 향하여 몬태나 주에 들어섰다.
이 지역 역시 황량하고 나지막한 구릉들로 이루어진 시골 풍경이어서 그다지 매력적인 관광지라고는 할 수 없었다. 넓은 목초지에는 소들이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었고, 민가도 보기 힘든 그야말로 벽지였다. 몬태나 주에는 거주하는 주민 수보다도 사육되는 소 숫자가 훨씬 많다고 하며, 주된 생산품도 감자나 우유 등 농, 축산물이 대부분이다. 이어지는 아이다호 주 역시 몬태나 주와 비슷한 황량하고 인적 드문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 밴프 바로 남쪽에 위치한 몬태나 주의 글래이셔 국립공원에 도착하였는데, 결국 우리는 이틀을 소비하여 밴프 바로 아래까지 되돌아온 셈이다.
공원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공원은 빙하를 뒤집어쓴 봉우리들이 장관이다. 이 공원은 캐나다의 워터튼 호 국립공원(Waterton Lakes National Park)과 국경을 경계로 맞닿아 있다. 그래서 그런지 미국 쪽 공원에서도 캐나다 국기가 나부끼고 있다. 공원에는 또한 빙하가 녹아 만든 100여 개 이상의 수정처럼 맑은 호수가 있고, 1000여 종의 식물과 수백 종에 이르는 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이 곳은 대륙의 가장 높은 부분을 잇는 대륙분기선(Continental Divide)이 통과하는 지점이다.
글래이셔 국립공원을 자동차로 관통하니 날이 어두워져, 그 근처의 마을에서 저녁을 먹고 1박을 하였다. 다음날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옐로스톤 국립공원(Yellowstone National Park)을 관광하기 위해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향량한 들판을 하루 종일 달린 후, 공원 입구 조그만 도시인 보즈만(Bozeman)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묵었다.
지금까지의 여행기록을 보면 이 글의 제목과는 관계없는 아주 단순한 여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좀처럼 겪기 힘든 아주 특별한 경험을 옐로스톤 공원에서 하게 된다.
- 2부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