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오염이나 지구온난화 등 생태계 변화로 인해 우리 주변에서 많은 생명체들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특히 수질오염으로 인한 수생생물들의 피해가 큰 것으로 보이는데, 예전에 온갖 물고기나 조개들로 가득 찼던 강이나 시내에서 요즘에는 생명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이러한 현상은 육지뿐만 아니라 바다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낚싯대만 드리우면 후드득 손맛을 느낄 수 있던 연안 바닷가가 요즘은 황폐화되어 어족 자원의 씨가 말랐다. 수질오염, 무분별한 남획 등으로 이제는 육지든 바다든 자연산 어패류는 구경하기조차 어렵다.
수생 생태계 변화에 비하면 산림 생태계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마을 주위의 야산을 개간하여 조성된 과수원, 도심지에서 쫓겨나 대도시 주변의 산기슭에 자리 잡은 공장, 새로 개설된 철도나 도로 등으로 산림이 일부 훼손되었지만, 인간의 생활권에서 다소 떨어진 산속에는 양호한 생태계가 조성되어 있다. 땔감이나 건축자재 확보를 위한 무분별한 벌목으로 중년 남자의 대머리같이 헐벗었던 산들이, 가스나 기름에 의한 취사나 난방 등으로 사람의 발길이 뜸해진 틈을 타서 온갖 나무와 풀들로 들어차 사람의 접근이 힘들 정도이다.
이러한 산림 생태계의 복원은 홍수조절, 공기정화, 동식물의 서식지 보존 등 긍정적인 요소가 많기는 하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초래한다. 예전과는 반대로 너무 빽빽해진 산림은 잡목과 칡이나 다래와 같은 덩굴식물들로 인해 상품성 있는 목재를 보기가 힘들게 되었다.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수시로 간벌, 잡초나 유해식물 제거 등의 작업이 필요한데, 이러한 곳까지 예산이 배정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 대부분의 산림이 사람의 손길을 거쳐 잘 관리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자연 그대로 방치되고 있는 현 산림 생태계의 또 다른 문제점은 환경의 변화로 인해 이전에 번성하였던 식물들이 점차 쇠퇴하거나 자취를 감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 예로, 우리나라 산림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소나무는 아카시아나 참나무 등 다른 활엽수들의 그늘 아래에서 생존이 어렵게 되어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에는 지구온난화, 재선충 등도 한몫을 했겠지만, 이에 대한 대책이 없으면 소나무는 점차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 갈 것이다.
지금은 찾기 어려워졌지만, 오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나무 중 하나는 소위 뽈똥 나무이다. 이 나무는 고도가 낮은 야산에서 가끔 발견되었는데, 높게 자라지 않고 가지가 많이 갈라졌었다. 잎은 타원형이고 꽃은 흰색이었으며, 열매는 녹색에서 노란색이 되었다가 가을에 익으면 빨간색으로 변한다. 크기가 콩알 만한 열매는 은회색 잔털로 덮여 있으며, 단맛과 신맛, 떫은맛 세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먹을거리가 귀했던 시절, 산에 땔감을 하러 갔다가 이 나무를 보면 우리는 만사를 제쳐 두고 나무에 붙어 뽈똥 열매를 즐겨 따먹곤 했었다.
야산에서 보기 어려워진 이 뽈똥 나무가 최근 가정집 마당에서 정원수로 많이 발견되고 있다. 그것도 뽈똥이라는 이름 대신 보리수라는 명칭을 달고서. 이 나무가 석가모니가 도(道)를 깨달았다고 하여 불교에서 매우 신성시하며, 나무 근처에 절을 짓고 절 마당에도 이 나무를 심는다는 그 보리수라는 말인가? 열매의 크기는 야생의 뽈똥보다 커지고 열매의 수확시기도 가을에서 초여름으로 바뀌었다. 아마도 야생의 뽈똥 나무를 관상용으로 품종 개량한 것으로 추측된다.
모양과 수확시기, 심지어 이름까지 바꾸어 오랜만에 내 앞에 나타난 뽈똥의 정체성에 대해 혼동이 생겨 한동안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마치 상투 틀고 명심보감을 읊던 자식 놈이 노랗게 염색한 파마머리에 타임지를 끼고 나타난 것 같은 충격이었다. 뽈똥이라는 명칭은 야산에서 이 나무를 볼 수 있었던, 나이 든 사람들만이 사용하는 용어이고 요즈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식물을 보리수라고 부른다는 것도 최근에야 알았다. 이 사건 이후, 빛의 속도로 발전하는 현대사회에서 나 자신만이 조선시대의 사대부로 뒤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일종의 불안감마저 엄습해 올 지경이었다.
우리가 살던 고향마을에서는 뽈똥이라 부르는 이 열매가 경상북도 지방에서는 뻘구똥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20여 년 전 직장동료로부터 전해 들은 일이 있다. 이는 이 식물의 명칭이 다른 사투리처럼 지역적으로 약간 달리 불릴 뿐, 근본적으로는 같은 명칭에서 유래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뚱맞게 보리수라니? 내 머릿속이 혼란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뽈똥의 정체에 대해 한바탕의 소동을 겪은 후, 이 열매가 보리똥으로도 불린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 결과, 혼란은 다소 진정될 수 있을 것 같다. 보리똥이라는 단어가 지역에 따라 뽈똥 혹은 뻘구똥으로 변화하여 불리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에 이르자, 보리수와 뽈똥이라는 용어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머릿속이 어느 정도 정리된 것이다.
뽈똥과 관련된 이러한 나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 정원에는 올해도 탐스럽게 뽈똥이 열렸다. 생전에 어머님이 이웃으로부터 개량종 뽈똥인지 보리수인지 모를 묘목을 얻어다 심은 이후로, 이 나무는 내 키 두 배는 됨 직하게 자랐다. 집 입구에 서 있는 뽈똥 나무는 요즘 같은 여름이면 빨갛고 탐스럽게 익은 열매로 집을 찾는 손님을 반긴다. 가지치기와 거름주기 덕에 나뭇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열매가 많이 달려, 열매를 따지 않으면 차량 진입이 불가능할 정도다. 이 나무는 줄기에 가시가 돋아 있고 조그만 열매를 일일이 하나씩 손으로 따야 하기에, 초창기에는 휘어진 가지를 대나무로 받쳐 차량통행만 가능하게 하고 열매의 수확은 포기했었다. 잘 익은 뽈똥 열매는 새들이 좋아하다 보니 수확 시기의 뽈똥 나무는 새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그러다가 이 나무에 대한 옛 추억은 나로 하여금 동심의 세계로 이끌었고, 몇 년 전부터는 겨울철 가지치기와 거름주기, 여름철 열매 따기를 반복하고 있다.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이 열매가 기침이나 천식에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에 의하면, 자기 부인이 감기에 걸려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며칠 동안 먹었는데도 기침이 떨어지지 않아 주위의 추천으로 뽈똥 진액을 복용한 후로는 증세가 많이 호전되었다고 했다. 동네 어른 한분은 이 나무는 줄기, 잎, 열매 모두 약재로 쓰여 버릴 것이 없다고 한다. 물론 이들 이야기는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연에서 자란 열매가 인체에 유해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올해부터는 보다 관심을 갖고 열매를 수확하려 한다.
며칠 전 아침 일찍, 뽈똥 나무에 붙어 뽈똥을 따기 시작하였다. 나뭇가지에 앉아 잘 익은 열매로 때 이른 아침식사를 하던 새들이 놀라서 도망을 간다. 참새보다는 몸집이 크고 비둘기보다는 작은 이 새들을 예전에는 본 적이 없다. 세계화로 인해 재화나 인력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드는 세상에, 이 새들도 국경을 넘어온 것인가? 울타리를 넘어간 가지의 열매는 지나가던 사람들이 맛보아서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 한낮의 더위를 피해 새벽부터 일터로 나가는 고향아지매(말이 아지매이지 실은 80대 노인들임)들이 뽈똥 많이 달렸다고 한 마디씩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것 좀 따서 드시라고 대꾸한다. 집 앞 전신주 위에선 까치가 울고, 먼 산에서는 뻐꾸기 소리가 아침의 정적을 깬다.
잘 익은 열매는 물러서 쉽게 터지기 때문에 이 열매 역시 조심스럽게 따야 한다. 가끔 터진 열매나 잘 익은 열매는 내 입속으로 가져간다. 그럴 때마다 처음에는 단맛, 잠시 후에는 신맛, 나중에는 떫은맛의 향연이 내 입속에서 스펙트럼처럼 펼쳐진다. 이 열매를 따면서도 나는 이것이 뽈똥인지 보리수인지 헷갈린다. 그러나 나는 명칭과 관계없이 이 나무에서 예전의 추억을 따고 동심을 맛보고 있다. 자연 속에서 사라져 간 예전의 "뽈똥"을 그리워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