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주팔자에 역마살이 끼었는지 고등학교 졸업 후 40여 년 동안 객지를 떠돌았다. 시골 출신들은 대개 어렸을 적부터 한 곳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오랫동안 자라왔기에, 직장이나 학업을 위해 자주 이사를 해야 하는 도시인보다 고향에 대한 향수나 추억이 강하다. 게다가 도시에서 신생아가 태어났을 경우, 산모의 주거지와 아기가 태어난 병원 중 어느 곳을 아기의 고향으로 해야 하는지, 다소 엉뚱하고 무의미한 고민에 봉착하게 된다.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자기가 태어나거나 자란 곳을 고향이라고 하면 왠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이런 사람들에겐 고향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도 않고 낯설게 느껴질 따름이다.
고향에 오면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고 편안한 마음이 든다. 심신이 안정되고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느낌이다. SNS 프로필 사진으로 고향집을 올려놓고, 그 밑에 '내 영혼의 안식처'라고 한 줄의 문구를 부연해 놓은 것이 이러한 나의 심정을 반영한 것이다. 도시에서 생활할 때에도 가끔 이 사진을 보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곤 한다. 최근 들어 고향집을 자주 찾게 되는 것도 이러한 안식을 얻기 위함이다.
복잡한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고향에서 심신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 나에게는 크나큰 행운이다. 대다수의 시골 사람들은 도시로 나가면서 고향의 집이나 전답을 처분해 버려,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다. 고향에서 같이 부대끼던 죽마고우들 중 일부는 너무 일찍 '그 강'을 건너버려, 영원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객지에서 불귀(不歸)의 객(客)이 된 동료에 비해, 죽은 후에라도 고향으로 돌아와 영원한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친구는 그나마 다행인 편이다.
시골에서는 도시와의 환경적 차이로 인해 생활면에서 변화를 가져오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식생활의 변화이다. 도시에서는 마트나 시장에 가서 식재료를 구입하여 식단을 꾸리는데 비해 시골에서는 지리적, 경제적 제약으로 인해 이들을 거의 자급자족해야 한다. 날씨가 추운 겨울철, 시골에서는 김장김치나 동치미에 시래깃국이 삼시세끼 식사 때의 주된 메뉴이다. 이 메뉴는 시골 사람들에게 예나 지금이나 식탁의 주빈으로 행세해 왔다.
어렸을 때는 지겹도록 먹던 이 메뉴가 그렇게도 싫었었다. 5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비린내 나는 생선토막이라도 기대하고 학교에서 돌아오곤 했는데, 평상시와 다름없는 메뉴가 차려진 밥상을 보면 괜히 화가 나서 어머니에게 투정을 부리곤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운 겨울 아침, 뜨끈뜨끈한 시래깃국 한 그릇이면 5리 등굣길도 거침없이 내달릴 수 있었다. 더구나 이 음식으로 식사를 하고 나면 속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최근 들어 김치나 시레깃국 등 전통 음식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다. 미국의 건강전문지인 '헬스(Health)'가 세계 5대 건강식품 중 하나로 김치를 선정하였다는 소식이라든지, 된장이 항암작용을 한다는 연구결과들은 우리 전통식품의 우수성을 재조명해야 할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과다한 영양섭취, 운동부족으로 비만이나 고혈압, 당뇨병 같은 성인병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우리의 전통음식은 웬만한 약이나 수술방법보다도 훌륭한 치료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래깃국의 주재료는 말린 시래기와 된장이다. 시래기는 배추나 무 잎을 말려서 만드는데, 늦가을 서리를 맞힌 잎을 따서 그늘에 말려야 한다. 서리에 얼고 녹기를 반복하면서 잎이나 줄기는 숙성되어 부드러워지고 풀냄새가 사라지며 맛이 농축된다. 어려운 역경을 이겨내고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자가 성공한 사람이 되는 우리의 인생행로와 닮았다.
시래깃국에서의 된장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된장은 국산 콩으로 담근 메주로 빚어야 제 맛이 난다. 한번은 어머님이 수입 콩으로 메주를 쑨 적이 있는데, 발효가 되지 않아 된장맛 나지 않는 된장으로 1년을 보내야 했던 적이 있다. 장맛이 1년 음식의 맛을 결정한다던 예전의 우리 조상들의 말을 실증적으로 증명했던 사건이다. 장 담그는 날에는 집안을 청소하고 몸가짐을 정결히 하며, 손 없는 날을 골라 정성스레 장을 담그는 관습도 이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로 어머님은 텃밭이나 멀리 떨어진 밭뙈기에 당신 손으로 직접 콩을 재배하여 장을 담그곤 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이제는 아들이 대물림 받아, 올해도 텃밭에서 탐스런 콩을 두말이나 수확해서 창고에 쌓아 놓으니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 된장을 만드는 데 있어서 콩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기에, 텃밭에서 경작하는 작물의 우선순위 1순위는 당연히 콩이다.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콩 농사는 계속 지을 생각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된장을 보다 맛있게 담그는 방법을 여기서 소개할까 한다. 메주에 소금물을 붓고 일정기간 숙성한 후, 액체인 간장과 고체인 된장을 분리하여 각각 따로 항아리에 보관하는데,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1차적인 된장을 사용하여 국이나 찌개를 끓이면 짜기도 하거니와 약간 쓴 맛이 난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메주 빚을 때처럼 메주콩을 푹 삶아 곱게 찧은 다음, 이 찧은 콩과 기존 된장을 1:1의 비율로 섞는다. 이렇게 하여 새로 탄생한 된장을 하루 쯤 상온에 두었다가 냉장고에 넣어 두고, 필요할 때 조금씩 떠내어 사용하면 구수하면서도 짜지 않는 된장국을 만들 수 있다.
고향을 떠난 후 객지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다양한 음식을 접하게 되었다. 서울서 처음 접한 호텔의 뷔페 음식은 몇 가지 메뉴 밖에 모르던 촌놈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었고, 맛깔스런 음식에 너무 욕심을 내어 식사가 끝난 후 몸을 일으키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길거리에 즐비한 음식점의 고소하고 바삭하게 튀긴 치킨, 입안에서 살살 녹는 피자, 육즙으로 풍미한 스테이크 등은 혀의 미각신경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직장생활 이후 경제사정이 나아지면서 식생활은 더욱 더 달거나 매콤한 메뉴 위주로 바꾸어져 갔고, 이에 따라 혀도 보다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져 갔다. 그러나 화려한 꽃이나 너무 강렬한 향수에는 일찍 싫증이 나듯이, 이들 음식에 점차 흥미를 잃어가게 되었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예전의 된장국이나 김치가 생각나는 것이다. 특히 외국생활을 하면 옛 음식에 대한 그리움은 더해진다. 이젠 시골에 오면 어린 시절과는 반대로, 생선이나 육류 대신 김치나 시레깃국으로 밥상을 차리는 것을 더 바라게 되었다.
채근담(菜根譚)에 의하면 "진한 술과 기름진 고기, 맵거나 단 것은 진정한 맛이 아니다. 진정한 맛은 다만 담백할 따름이다(膿肥辛甘 非眞味 眞味 只是淡)"라고 음식의 참맛을 갈파하고 있다. 이 글을 읽을 때마다 시레깃국이나 동치미같이 심심한 맛이 진정한 맛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도심을 수놓는 휘황찬란한 불빛 속에 온갖 자극적인 맛으로 손님을 유혹하는 시대에, 조용한 시골에서 맛보는 담백한 시래깃국이야말로 우리 조상들이 물려주신 진미(眞味)가 아닐까?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이 가르침은 통한다. 사람을 만날 때 너무 적극적이거나 자주 만나면 그 만남은 오래 가지 못한다. 적극성을 띠지 않고 자기 존재를 너무 알리려 하지 않는 담백한 만남 속에 오랜 우정이나 돈독한 인간관계가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고향집에 오면 마음이 푸근하듯이, 고향의 음식을 먹으면 속이 편안해진다. 오늘도 냉장고 속의 된장항아리를 끄집어낸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날씨가 따뜻하지는 초봄에는 시래깃국과 절묘하게 궁합이 맞는 식재료가 있으니 바로 냉이이다. 다가오는 봄날에는 냉이 몇 뿌리를 넣고 시래깃국을 끓여, 냉이에서 풍기는 삶의 향기와 된장과 시래기가 가르치는 인생의 교훈을 맛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