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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한에 찾은 고향집

by 여송

엊그제가 일 년 중 가장 춥다는 소한이었다. 소한의 글자 그대로의 뜻은 작은 추위이며 따라서 언뜻 보기에는 다음 절기인 대한보다 덜 추운 것으로 생각될 수 있겠지만 '대한이 소한이네 집에 가서 얼어 죽었다', '소한에 얼어 죽은 사람은 있어도 대한에 얼어 죽은 사람은 없다'는 속담을 보면 소한 무렵이 가장 춥기는 추운 모양이다.

소한 때면 고향의 강물도 얼어붙어 강에서 썰매를 타거나 얼음 배를 만들어 띄우기도 하고, 얼음을 잘라내어 그 위에 솔가지를 꺾어 얹은 다음, 공동묘지 꼭대기에 올라 썰매를 타곤 했다. 울퉁불퉁한 무덤 위를 얼음 썰매를 타고 내려올 때의 스릴이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즐기던 공동묘지에서의 얼음썰매가 아마도 모굴스키의 원조가 아닌가 싶다.



이러한 쾌락의 뒤에는 항상 그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가끔 썰매나 얼음배 타다가 차가운 겨울 강물에 빠지거나 얼음 썰매가 녹아 옷이 젖기도 하는데, 이럴 때면 모닥불을 피워 놓고 젖은 옷 말리다가 옷을 태워 먹기도 하고, 공동묘지에 산불을 내어 묘지가 홀랑 타버려 무덤 속 망자(亡者)의 후손들로부터 혼이 나기도 하였다. 당시만 해도 무덤이 불에 타버리면 무덤 속 영혼이 달아난다고 하여 자손들은 크나큰 불효를 저지르는 것으로 여겼으며, 이에 대한 치유책으로 볏짚을 여물처럼 잘게 썰어 무덤 위에 뿌리곤 했다. 이런다고 달아난 영혼이 다시 돌아오리오마는, 이렇게 해서라도 조상의 무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다는 죄의식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한 자손들의 몸부림으로 보인다. 죽은 사람의 시신을 대부분 화장하는 요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이런 행위는 하나의 미신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지만, 우리 조상들의 효심을 엿볼 수 있는 풍습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소한 무렵에 찾은 고향집.

동네 가운데로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할머니 한 분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무장을 한 채, 유아용 보행기에 의지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강추위에 할머니의 발바닥이 지면에 얼어붙었는지 내딛는 걸음걸이가 느리고 힘겨워 보인다. 이 할머니는 외풍이 심하고 난방상태가 부실한 시골 주택의 한기(寒氣)를 피해, 그나마 상대적으로 따뜻한 마을 경로당을 향해 생존을 위한 본능으로 이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집 앞 밭둑의 잡초들은 계속되는 소한 추위에 모두 갈색의 주검으로 변하였고, 하늘을 날던 기러기나 청둥오리들도 추위를 피해 남쪽나라로 도망갔는지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작년 가을에 심은 마늘만이 양지바른 담벼락 아래에서 누렇게 뜬 얼굴로 추위와 맞싸우고 있다. 집 앞마당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던 들고양이가 모처럼 나타난 주인의 인기척에 놀라 냅다 도망을 친다. 모두들 소한 추위에 지치고 힘겨운 듯 생기를 잃었고, 이 모진 겨울이 하루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랜 기간 동안 보일러 한 번 켜지 않고 묵혀 놓았던 집안의 차디찬 냉기가 얼굴을 덮친다. 안방에 걸린 사진 속의 어머님이 추위에 떨고 계신 것 같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전기보일러 컨트롤 박스에 나타난 실내온도는 8도. 그나마 한낮에는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실내로 스며들고 있어 온도가 높은 편이다. 전기요금 몇 푼 아낄 거라고 이런 추위에 어머님을 방치한 불효자식을 용서하소서.



사실 어머님은 생전에도 춥게 겨울을 보내시곤 했었다. 전기요금이 당신의 아들 계좌에서 자동 이체되는 것이 미안한 나머지, 한겨울에도 실내온도를 낮게 설정해 놓고 두꺼운 스웨터를 입고 생활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좀 따뜻하게 해놓고 지내시라 해도 막무가내였다. 이러한 현상은 주위의 다른 독거노인들도 마찬가지여서 보일러를 작동시키지도 않은 채 전기장판으로 겨울을 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오는 동네 어른들이 '이 집은 부잣집이라서 따뜻하네' 할 정도였으니...

한 번은 시골집 이웃에서 큰 소리가 나서 내다보니 작은 아들이 모처럼 어머니 혼자 사는 고향집을 방문했는데, 어머니가 한겨울에 보일러도 가동하지 않고 지내는 것을 보고 화가 난 나머지 보일러를 부숴버리겠다고 고함을 치는 것이었다. 그 집은 기름보일러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보일러 기름은 아들이 꼬박꼬박 채워 놓음에도 불구하고 이 어머니 역시 아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그런 행동을 하였던 것이다. 비록 자식이 어머니를 향해 고함을 치기는 했지만 보기 싫은 행동은 아니었고, 오히려 가슴 한 편이 따뜻해 옴을 느낄 수 있었다.

소한 추위에 집 안팎 수도관이 얼어 터졌는지 확인하고 1층 창고에 저장해 둔 무 두 개, 배추 서너 포기와 쌀 몇 되를 챙긴 다음 다시 보일러 설정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컨트롤 박스 앞에 섰다. 이번에도 역시 돈 몇 푼이 아까워 보일러를 외출 상태로 설정하였다. 이렇게 되면 실내온도가 0도까지 내려가야 동파를 막기 위해 보일러가 잠시 작동한다. 썰렁한 실내를 가로질러 현관문을 잠그기 직전 어머님 사진을 보고 착잡한 마음으로 넋두리한다.


"어머님, 소한 추위가 매섭습니다. 부디 건강 조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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