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하고 삭막한 도시 속에서 심신이 지쳐갈 때면 나는 주저 없이 나의 고향을 찾는다. 한때 시골마을이었던 고향도 주위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주변 도로의 교통량이 늘어나는 등 도시화의 물결을 피해 가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내 어릴 적 추억이 아스라이 배어 있는 동산과 개울이 아직도 건재하다. 고향집은 SNS의 프로필 사진으로 쓰이고 있으며, 그곳은 사진 아래에 등장하는 문구인 "내 영혼의 안식처"이다.
아늑하고 포근한 고향집을 찾을 때면 나를 제일 먼저 반겨주는 것은 집 앞뜰에 서 있는 소나무들이다. 이 소나무들은 사시사철 푸른빛으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브런치에서 사용하는 나의 필명인 여송(與松)이 '소나무와 더불어'라는 뜻인데, 이는 소나무로 둘러싸인 고향집을 방문한 친구들이 나에게 붙여준 호(號)이다.
소나무는 대나무와 더불어 겨울에도 시들지 않고 사시사철 푸르른 상록수이다. 대나무가 난대성 식물로 따뜻한 지방에서만 자라는 데 비해, 소나무는 추운 지방에도 잘 자란다. 대나무는 자라는 곳이 제한되어 있어 쉽게 접할 수 없지만, 소나무는 광범위하게 자라고 있어 우리 주위의 어디서든 보거나 만날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의 용이성 때문에 소나무는 과거부터 문인화나 시조의 소재로 많이 사용되어 왔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나 고산 윤선도의 시조는 소나무를 소재로 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소나무의 또 다른 특징은 다른 환경에로의 적응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높다란 산꼭대기, 흙 한 줌 없는 바위틈에서 자라난 소나무를 뽑아 비옥한 토양으로 옮겨 심는다 해도 그 소나무는 생존하지 못한다. 이러한 소나무의 환경적 부적응성은 사시사철 푸르른 속성과 더불어,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충절에 비유되곤 했다. 예로부터 부당하게 정권을 잡은 군주가, 자기에게 협조하지 않는 충신들에게 온갖 벼슬과 재물로 회유하거나 협박하여도 굴하지 않는 지조나 절개를 소나무의 이러한 특징과 연관시키기도 했다. 한 예로, 단종 복위에 목숨을 바친 성삼문의 시조 속 소나무는 그의 충절을 대변하고 있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요즘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도덕성과 인간성의 상실이라고 생각된다. 자신이 가진 정치적 이념이나 신념을 망각한 채, 선거철만 되면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거듭하는 정치인, 본인에게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 이익을 좇는 기업인, 자신의 의무는 도외시한 채 권리만 찾는 개인, 이 모두가 도덕성 결핍과 인간성 상실로 인해 나타나는 사회적 병폐인 것이다.
우리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 자라나 몸은 비대했으나, 정신적으로는 나약하여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인간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소나무의 의협심(義俠心)과 만고불변의 푸르름이 상징하는 불변성(不變性) 일지도 모른다.
소나무는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나무 중의 하나일 것이다. 정원을 보유하고 있는 가정에서는 소나무 한두 그루 정도는 가까이 두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보편적인 정서이다. 그런데 이러한 희망을 현실화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다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나무의 특성으로 인해 이식 시 생존 가능성이 낮다는 점이다. 소나무를 옮겨 심을 때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옮겨 심고자 하는 곳의 환경을 기존의 환경과 최대한 비슷하게 해 주어야 한다. 이식 시 뿌리 부분의 흙을 가급적 많이 붙여 심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따라서 이식 대상 소나무를 물색할 때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은 소나무가 자생하고 있는 곳의 토질이다. 마사토나 사질토와 같이 점성이 떨어지는 토양에서 자란 소나무는 뿌리 주변의 흙을 붙여 옮기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식 후의 생존율이 극히 낮아진다. 시골집 정원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들도 대부분 찰기가 있는 토질에서 자라던 어린 묘목들을 옮겨 심었는데 다행히 모두 생존하였다. 다 자란 소나무보다는 어린 소나무를 이식하면 생존율이 높은 반면, 큰 나무로 성장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 물론 이 소나무들은 소나무 채취를 금지하는 법이 시행되기 이전에 옮겨 심은 것들이며, 요즈음은 야산에서 소나무를 무단으로 반출하면 불법이다.
한편, 최근 들어 우리나라의 소나무 식생과 관련하여 몇 가지 우려스러운 점이 관찰되고 있다. 우선 재선충으로 인한 피해를 들 수 있다. 재선충은 1980년대 말, 부산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어 현재까지 우리나라 소나무에 많은 피해를 주고 있다. 이 해충은 일본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을 여행한 사람들은 보았겠지만, 그곳의 산에는 재선충으로 인해 대부분의 소나무가 폐사하고, 그 자리를 편백나무의 일종인 히노끼가 차지하게 되었다. 지구온난화 역시 소나무의 생존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추정된다. 기온의 상승은 활엽수의 번식을 촉진하고 이들은 소나무의 생장을 방해하게 된다. 최근, 도시 주변의 야산까지 참나무나 아카시아 등이 번창하고 있어 소나무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고, 가을이 되면 푸르러야 할 산들이 이들 활엽수의 단풍으로 인해 온통 붉게 물들 정도다.
이와 같은 상황이 지속되면 우리나라 삼천리강산에서 소나무를 볼 수 없는 날이 올 수도 있다. 언젠가는 소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될지도 모를 일이며, 애국가에서 소나무라는 단어를 제외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소나무가 없어지면 가뜩이나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있는 현시대의 우리들이 그 나무가 가지고 있는 상징적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할 것이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정가위를 들고 집 앞 정원의 소나무 앞에 섰다. 정성스레 소나무 잔가지를 솎아내고 웃자란 가지들을 잘라주었다. 이 소나무들을 바라보며 옛 성현들의 고귀한 가르침을 배워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해 본다. 그러나 소나무의 S라인을 보면 자꾸 여인의 늘씬한 몸매가 연상되는 걸 보면, 나는 아직 마음의 수양이 덜 되어도 한참 덜 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