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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송 Feb 12. 2018

대나무

  나의 유년기를 보냈던 시골마을에는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었다. 대나무는 마을 뒤편 언덕의 가장자리를 따라 쭉 늘어서서 마을 전체를 감싸는 형상을 하고 있었으며, 그 아래 삼태기같이 오목한 부분에 촌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멀리서 보면 마을 전체가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 대나무 숲이 끝나는 지점에 우리 집이 위치해 있어, 우리 집 역시 대나무 숲에 둘러 싸여 있었다. 동네가 북쪽으로 향하고 있기에 겨울에는 다소 을씨년스러워 보이기도 했으나, 마을을 감싼 대나무 숲과 움푹 꺼진 구덩이의 안쪽에 위치한 마을 형태가 그나마 썰렁한 분위기를 다소 완화시켜 주고 있었다. 

  대나무 숲을 놀이터 삼아 자라난 우리들에게 대나무에 대한 추억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월 대보름날, 달집을 짓기 위해서 맨 먼저 했던 일이 이 집의 뼈대가 되는 대나무를 구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대숲의 주인들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곤 했다. 달집 태우기는 가정의 평화와 마을의 번영을 위한 중요한 행사여서 그들은 흔쾌히 대나무의 벌목을 허용했다. 날씨가 무더운 여름철이면 대나무 숲은 한밤 중에 냉각된 시원한 공기를 품고 있어 최상의 피서지를 제공한다. 비록 한낮에도 달려드는 모기들이 피서의 효과를 반감시키긴 하지만... 대나무는 또한  우리들에게 피리나 물총 등 휼룽한 장난감을 선물해 주었다. 이들 장난감은 천연소재로 된 것이어서 환경호르몬 등 오염물질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그야말로 친환경 장난감이었던 셈이다.   



  옛날에는 대나무가 다방면으로 사용되어 상당히 귀하고 값비싼 나무였다. 따라서 대나무가 자라는 밭이나 임야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사는, 부자 반열에 오른 사람이었다. 대나무는 바구니나 광주리, 발, 부채 등 다양한 생필품의 재료로 사용되어 수요가 많았으며, 돌보지 않아도 저절로 잘 자라는 나무였다. 대나무의 이런 실용적인 속성 때문에, 에전에는 대나무 장인들이 며칠씩 우리 집에 머물면서 살림살이에 사용될 여러 가지 공예품을 만들곤 했다.

  대나무는 5월쯤 땅속에서, 소위 말하는 죽순이라는 새싹이 올라오면서 자라나기 시작한다. 죽순은 대나무 뿌리에서 움이 돋아난 것으로, 대나무는 이와 같은 뿌리의 움을 통해서 번식한다. 죽순은 특히 초여름 비 온 후에 많이 돋아나며, 이로 인한 속담이 "우후죽순(雨後竹筍)"으로, 어떤 일이 한때에 많이 생겨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인다. 죽순은 예나 지금이나 식재료로 많이 애용되고 있다. 죽순 하나가 대나무 한 그루로 자라나기 때문에 죽순 꺾다가 주인에게 들키면 옷이 다 벗겨지는, 요즘 말로 성추행(?)에 상당하는 체벌을 받곤 했다. 죽순은 섬유질과 여러 가지 미네랄을 많이 함유하고 있으면서도 칼로리는 매우 적어, 다이어트나 건강식품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땅속에 묻혀 있는 대나무 밑부분을 파보면 제일 아래쪽에 단단한 대나무 뿌리가 일직선으로 뻗어 있고, 그 뿌리의 마디에서 조그만 움이 돋아나 죽순으로 자란다. 이 죽순은 자라면서 땅속에 가운데는 볼록하고 위, 아랫부분이 잘록한 화병 모양의 대나무 둥치를 만드는데, 둥치 표면에 새끼손가락만 한 또 다른 뿌리를 수없이 내려 땅 속으로 고정시킨다. 이렇게 사방에서 강력한 뿌리가 대나무 둥치를 고정시키고 있기 때문에, 대나무는 아무리 세찬 바람이 불어도 넘어지거나 뿌리가 뽑히지 않는다. 지진이 발생할 경우 대나무 숲으로 피신하라는 말은 이곳은 대나무 뿌리가 사방으로 얽혀 있어 땅이 갈라지지 않는다는 믿음에서 유래된 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용비어천가의 한 구절 역시 대나무에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이다. 이 가르침은 인격과 덕망을 쌓은 사람은 주위의 회유나 협박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로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대나무 둥치를 파내어 깎고 다듬으면 모양과 무늬가 아름다운 공예품을 만들 수 있는데 이 작업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이 대나무 둥치를 땅속에서 파내는 일이다. 무쇠보다 더 단단한 대나무 둥치를 깎고 파내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지만, 대나무 뿌리로 뒤엉킨 땅 속에서 둥치를 파내는 작업에 비하면 그건 아무 일도 아니다. 이 작업에는 곡괭이, 괭이, 삽, 톱, 쇠톱, 지렛대 등 여러 가지 도구가 필요하다. 파낸 둥치는 소금물에 보름 정도 담가 수분을 제거해야 공예품을 완성된 후 균열이 가지 않는다. 각 단계마다 고난도의 공정이 필요해 오늘날까지 이 공예품을 세 개밖에 만들지 못했다. 



  일단 죽순이 자라나서 대나무로 성장하면 더 이상의 성장을 멈춘다. 이 시점부터는 대나무는 목질을 단단하게 하여 자신의 내면을 성장시킴과 동시에, 다른 대나무를 번식시키는 데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한다. 대나무가 겉으로 보기에는 오랜 기간에 걸쳐 그냥 한 곳에 할 일없이 서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자신의 성숙과 자손의 번영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대나무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닮았다. 


  대나무는 또한 아무리 세찬 바람이 불어도 휘어질망정 부러지지는 않는 강한 재질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식물은 사군자의 하나로서 사시사철 푸르름과 단단하고 곧게 자라는 속성으로 인해 옛날부터 선비가 갖추어야 할 인품과 덕목의 하나인 절개와 강직성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오죽했으면 곧고 강인한 성품을 가진 사람을 일컬어 '대쪽 같은 사람'이라고 할까? 

  이와 같은 대나무의 변함없는 푸르름과 올곧은 속성은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선비정신에 비유되곤 했다.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가 역성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조선 태조 이성계에게 무릎 꿇지 않는다는 이유로 피살당한 곳이 개성의 선죽교이다. 이 다리의 이름은 본래 선지교였는데, 정몽주가 피살되던 날 밤에 다리 옆에 대나무가 솟아났다고 하여 다리 이름을 선죽교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오늘날 플라스틱 등 다양한 소재의 등장으로 더 이상 대나무는 생필품의 재료로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대나무의 퇴조로 우리 조상들의 청렴성과 강직성 등 선비정신마저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더욱 아쉽다. 

  그나마 아직 대나무의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곳이 대나무를 이용하여 색다른 밥을 지어서 파는 일부 식당이다. 이른바 대통밥이라고 하는 이 음식은 대나무를 잘라 그 속에 불린 쌀이나 잡곡을 넣은 후 입구를 한지나 헝겊으로 봉한 다음 솥에 넣고 쪄낸다. 이들 식당에서는 대나무의 효능에 대해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그들은 대나무가 가진 보다 고차원적이고 정신적인 속성에는 관심이 없고 물질적이고 말초신경적인 속성만 강조한 나머지, 대나무에는 비타민이 A부터 Z까지 다 들어 있으며, 스칸듐, 바나듐, 크롬 등의 전이 원소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미네랄이 들어 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강한 북풍에 집 뒤편의 대나무 줄기들은 물결치듯 휩쓸리고, 가지와 이파리들이 부딪치며 내는 비명소리가 한겨울의 체감기온을 더욱 떨어뜨린다. 저녁 무렵, 바람이 잔잔해지는 틈을 타서 대나무 한 그루를 베어 대통밥에 도전해 보기로 한다. 이 작업 또한 만만치가 않다. 우선 쌀을 물에 불린 후, 은행열매와 대추 등을 대통 속에 넣고 입구를 헝겊으로 밀봉시킨다. 대나무 가지로 꽉 채운 솥에 물을 부은 다음, 속이 채워진 대통을 수직으로 세운다. 솥 안의 대나무 가지들이 지지대 역할을 하여 대통이 넘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솥뚜껑을 닫은 후 센 불로 한 시간 정도 쪄내면 고소하고 단맛이 약간 나는 대통밥을 얻을 수 있다. 

  이 어려운 작업을 거쳐 완성된 대통밥을 통해서 대나무가 지니고 있는 비타민이나 미네랄 같은 식품 영향학적 요소보다는 조상들의 고결하고 강직한 철학적 선비정신을 섭취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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