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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송 Mar 25. 2018

매화송(梅花頌)

  2월 중순, 가는 겨울이 아쉬운 듯 차가운 북서풍과 함께 매서운 추위가 온 천지를 강타합니다. 아직 대지는 꽁꽁 얼었고, 저 멀리 보이는 지리산의 산꼭대기는 하얀 눈으로 뒤덮였습니다. 사람들은 휘몰아치는 찬바람에 외투 깃을 여미며 종종걸음으로 갈 길을 재촉합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산허리를 휘감고 돌던 새들은 자취를 감췄고, 외딴 집 앞마당의 바둑이도 자신의 보금자리 속에서 주둥이를 앞가슴에 파묻고 꼼짝도 않습니다. 모두가 이 추위와 배고픔으로 고달픈 겨울이 빨리 지나가고 따뜻하고 생기발랄한 봄이 오기를 숨죽여 기다리고 있습니다.

  양지바른 산비탈에 서 있는 매화나무의 꽃봉오리가 살포시 부풀어 오릅니다. 겨우내 찬바람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닫혀 있던 꽃눈의 껍질들이 마음의 문을 살짝 열고 미지의 바깥 세계로 고개를 내밉니다. 마치 가련하고 청순한 소녀가 가슴 속에 품은 풋사랑이 그리워 수줍은 얼굴로 담장 너머로 고개를 살포시 내밀고 먼 길을 응시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얼어붙고, 천하가 추위에 떨고 있는 엄동설한에 매화는 이 한기(寒氣)를 뚫고 제일 먼저 봄을 알립니다. 이 꽃은 또한 겨울이라는 고난을 온몸으로 이겨낸 인내성의 화신이자 희망의 등불이며, 만물을 봄으로 이끄는 선구자입니다. 이와 같은 매화의 강인한 생명력은 속세의 삶이 고달픈 중생들에게 삶에 대한 의욕과 불굴의 투지를 가져다줍니다.

  매화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 겪은 온갖 고통과 시련을 아름다운 자태와 고결한 향기로 승화시킵니다. 매화의 황홀한 자태와 은은한 향기는 나약한 인간의 영혼마저 도취시킬 지경입니다. 온 산하를 뒤덮은 흰 눈과 얼어붙은 대지를 어렴풋이 비추는 그믐달을 배경으로 가련하게 피어난 한 송이의 매화는 청초한 자태의 한 여인입니다. 그 여인의 옷은 우아하기는 하나 화려하지는 않고, 여인의 향기는 그윽하기는 하나 자극적이지는 않습니다.

  추위를 이기고 꽃을 피우는 이 꽃은 예로부터 불의에 굴하지 않는 지조 또는 절개를 상징하여 왔습니다. 매화는 가난하여도 일생 동안 그 향기를 팔아먹지 않는다(梅花一生寒不賣香)라는 말은 이 꽃의 곧은 심성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매화의 상징성은 부당한 권력에 굴하지 않고 세속과 타협하지 않는 우리 조상들의 선비정신의 근간(根幹)이 되어 왔습니다. 예로부터 매화는 사군자의 필두로서, 고결한 선비의 상징인 군자를 닮은 식물로 추앙받아 온 것이 이를 말해 줍니다. 이 꽃은 또한 소나무, 대나무와 더불어 세한삼우(歲寒三友)로 불릴 정도로 극한의 조건 속에서도 그 고고한 모습을 잃지 않아 선비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성삼문은 매화와 대나무의 지조와 도리를 실천하기 위해 자기의 아호를 매죽헌(梅竹軒)이라고 하면서 단종에 대한 절개를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송강(松江) 정철은 선조의 미움을 받아 고향에 은거하면서도 사미인곡(思美人曲)에서,


                    저 매화 꺾어내어 님 계신데 보내고저

                    님이 너를 보고 어떻다 여기실꼬


라고 하면서 임금에 대한 충절을 노래함에 있어서 매화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온갖 역경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꽃을 피우는 매화는 또한 여인의 순결과 정절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규방(閨房)의 규수(閨秀)나 부인들이 매화가 그려진 비녀나 은장도를 지니고 다닌 것은 이 꽃이 지닌 이러한 속성 때문이었습니다. 열녀( 烈女)의 초상화나 미인도의 배경에 자주 등장하는 매화 역시 그림 속 주인공의 순결과 절개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매화는 보통의 꽃과는 달리, 나무의 늙은 모습을 귀하게 여기고 어리고 새로 난 나뭇가지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꽃나무는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진 오래된 나무 둥치에서 보다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매화는 어른들을 공경하고, 그들로부터 삶의 지혜를 배우고자 했던 우리 조상들의 효(孝) 사상을 말없이 실천하고 있습니다. 매화의 고목나무 줄기에 돋아난 가시는 오랜 세월에 걸쳐 불의와 타락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온 한 자루의 창과 같은 무기입니다. 매화는 또한 이 무기를 통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자신을 채찍질합니다.

  혹한과 적설 속에서 피어난 매화꽃의 도도한 자태와 그윽한 향기는 초여름의 매화 열매에까지 이어집니다. 매실은 매화꽃이 진 자리에서 자라난 열매로서 매화의 아름다운 자태를 이어 받아 미인의 얼굴같이 갸름하고 동글납작하게 생겼고, 매화 향기는 세월의 연륜 속에서 농축되어 열매 곳곳에 켜켜이 쌓였습니다. 매화향은 인격을 가진 사람이 마음의 평정심을 가진 상태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신세계의 향기입니다. 옛날 선비들은 이 매실로 술을 빚어 다시 한 번 매화의 선비정신을 되새기고 그 향기에 취하곤 했습니다.

  매실은 또한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 하늘로부터 내려 받은 정기와 언 땅속에 뿌리를 박아 뽑아 올린 대지의 기운을 결합시켜, 세파에 찌든 인간의 몸속에서 기생하고 있는 갖가지 해악들을 퇴치하는 능력을 지닌 신비로운 명약입니다. 이 열매는 옛적부터 우리 조상들의 소화불량이나 이질 등의 질병에 구급약으로 사용되어, 가난하고 힘든 백성들을 치료해 왔던 백의의 천사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이런 점에서 매화는 권력이나 재력을 가진 사람보다는 착하고 소박한 서민들에게 잘 어울리는 꽃입니다.

  몇 년 전, 지리산 자락의 단속사지(斷俗寺址)에서 본 정당매(政堂梅)는 매화가 지닌 기품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이 매화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나무를 심은 강회백의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 겸 대사헌에 이르렀기에 이런 이름이 지어졌다고 합니다. 절 이름이 뜻하듯 속세와의 인연을 끊은 곳에서 600여 년의 풍상을 겪어 온 매화나무의 줄기는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없어진 절의 대웅전처럼 썩어 내려앉았고, 그 등걸에서 새 가지를 뻗어 내려 모진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우아하고 고고한 매화의 자태는 절터 앞에 외로이 남은 석탑처럼 긴 세월의 흐름에도 변함이 없었을 것이고, 하얀 꽃에서 배어나오는 은은한 향기 역시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골짜기를 채우고 있겠지요. 불행히도 이 나무는 최근에 고사되었고, 그 자리를 손자나무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생명을 이어 오던 매화나무가 왜 하필 이 시점에 죽은 걸까요? 인간성이 상실되고 가치관이 전도된 이 삭막한 행성에서  더이상 살아가기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천연덕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을 생각하니 자책감이 엄습해 옵니다.


 

  정목일은 매화를 보고 "그 모습은 천연 달빛을 머금은 눈부신 백자와 같고, 정한하기로는 흰 모시옷보다 더하고, 한지(韓紙) 방문에 물드는 새벽빛 서기가 서려 있다. 그리고 정화수의 정결한 마음과, 푸른빛 도는 은장도의 순결미를 안으로 품고 있다"고 했습니다. 매화가 지닌 속성을 함축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나는 시골집 정원에 한 그루의 매화나무를 심으렵니다. 창가에 홀로 앉아 매화꽃의 아름다운 자태를 눈 속에 가득 담고, 꽃과 열매에서 배어 나오는 향기를 코 속에 저장할 겁니다.  아울러 오늘날 우리가 처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꿋꿋이 버틸 수 있는 기다림과 희망의 정신을 이 꽃으로부터 이어 받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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