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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剪枝)작업에서 얻는 교훈

by 여송

북반구에서 연중 태양의 고도가 가장 낮다는 동지가 지나고 서서히 해가 길어지기 시작한다. 사계절이나 하지, 동지들은 지구의 축이 23.27도 기울어진 상태로 태양 주위를 공전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지구 축의 기울기에 대해 고교 시절에는 23.5도로 배웠는데 각도 수치가 바뀐 이유는 그 사이 지구과학이 발전하여 보다 정밀한 기울기 측정이 가능해졌거나, 슈퍼맨이 지구를 움직이다 지구축이 조금 바로 세워졌거나 둘 중의 하나일 거라고 추측할 따름이다. 어쨌거나 지구축이 기울어진 관계로 우리는 지금 한반도에서 춘, 하, 추, 동 사계절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올겨울에는 예년과 다른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초겨울인 12월에는 강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 1년 중 가장 추운 소한 전후에는 포근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조만간 추위가 다시 도래한다고 하지만, 그리 오래 갈 것 같지는 않다.

겨울이 따뜻하면 농촌 생활에 있어서 여러 면에서 혜택을 본다. 우선, 춥지 않은 날씨는 농부가 야외에서 농사일 하는 데 방해를 주지 않는다. 또한 보리나 밀 같은 월동작물의 생육이 촉진되어 작황이 좋아지기도 한다. 고추나 화훼 등 겨울철 비닐하우스 속 높은 기온에서 성장이 가능한 작물에 대한 난방비가 적게 들어 농촌경제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반면, 예로부터 겨울이 온난하면 병해충이 창궐하여 다음 해 농사가 흉작이 된다는 말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아무리 따뜻한 날씨라고 하지만 겨울은 겨울이다. 나무들은 영양분의 공장인 잎을 모두 떨군 채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다. 땅 위의 대부분의 풀들은 이미 말라 죽었고, 냉이나 독새풀 같은 추위에 강한 잡초들만 병든 환자의 누런 얼굴로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농작물이라곤 양지바른 밭에 솟아난 마늘과 파, 시금치 등 월동작물만이 푸른 잎사귀를 펼친 채 한겨울의 추위를 견뎌내고 있다.

겨울이 되면 농촌은 한가해진다는 말은 옛말이 된지 오래다. 이 추운 계절에도 농부들은 비닐하우스 속에서 딸기, 토마토, 고추 등을 재배하거나 과일나무 밑거름 주기, 가지치기 작업 등으로 분주하다. 농가소득은 도시의 가계소득에 미치지 못하지만 생활수준은 도시 사람들과 별 차이 없는 것이 오늘날 농촌의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농촌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 겨울철이 되면 농한기라고 하여 따뜻한 구들목에서 고구마를 쪄먹거나, 양지바른 담벼락 아래서 윷놀이하면서 소일하던 모습은 이젠 예전의 풍경이 되고 말았다. 그만큼 농촌의 삶도 팍팍해졌다.

겨울이 가기 전에 시골집에서 해야 할 첫 과제는 정원수와 과일나무의 가지치기이다. 전지(剪枝) 혹은 전정(剪定)이라고 하는 이 작업은 나무가 원하는 형태로 자라도록 불필요한 가지를 잘라주는 것을 말한다. 정원에는 소나무 10여 그루와 감나무, 복숭아, 자두나무 등 과일나무가 심겨져 있는데, 이들 모두 전지작업이 필요한 나무들이다. 집 주위에 울타리 대용으로 심은 히말라야시다, 주목, 구상나무, 쥐똥나무, 측백나무 등도 사람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으랴마는 이 전지도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히말라야시다 같이 잎이 뾰족한 침엽수를 전지할 때에는 눈이나 피부가 찔리는 수가 많다. 이런 나무들에 대한 전지작업 후 목욕탕에 들어가면 찔린 부위가 바늘로 쑤시는 듯 따가워지는 고통을 맛본다. 소나무의 높은 가지를 전지하기 위해 위로 올려다보고 작업을 하는 경우에는, 나무껍질이나 솔방울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가 눈 속으로 들어가 눈동자를 움직일 때마다 꺼칠함이나 통증을 느낀다. 다음날 아침에는 이들 이물질이 새까맣게 눈곱에 섞여 나오기도 한다. 측백나무와 같이 키가 큰 정원수의 꼭대기 부분을 전지하기 위해 높은 곳까지 올라가면, 발 아래가 아득하게 보이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때론 목숨을 담보해야 하기도 한다.

전지를 할 때에는 햇빛의 방향이나, 나무가 장차 자라나면서 가져야 할 형태 등을 고려하여 남겨둘 가지는 남겨두고, 나머지 가지들은 잘라내어야 한다. 다소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런 점에서 전지작업은 과학과 예술의 결합체라고 할 수 있다.

전지작업은 나무의 종류에 따라 그 작업내용이 달라진다. 정원수의 경우 모양을 예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경용으로 많이 심는 주목은 원추형 꼴이나 탑신이 여러 개인 석탑 형태로 가꾸는 것이 일반적인 반면, 소나무는 밑둥이 굵고 가지 수나 잎이 적은 분재형 형태를 선호한다.

과일나무의 경우 나무 가지가 햇빛을 잘 받고 통풍이 잘 되게 하여, 열매와 나무를 크고 튼튼하게 키우는 것이 전지의 주목적이다. 이를 위해 북쪽으로 향한 가지나 촘촘한 부위의 가지를 우선적으로 잘라내고, 길게 자란 가지는 일정한 길이가 되도록 절단해야 한다. 이는 통상적인 과일나무의 전지방식이고, 감나무와 같이 1년생 가지에서 열매를 맺는 과일나무와 배나 사과, 복숭아같이 2년생 이상 가지에서 열매를 맺는 나무는 전지방식이 또 달라진다.

전지작업에서 유의하여야 할 사항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교훈으로 자주 인용되는 "마음을 비워야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이 작업에 있어서 적용하여야 할 최고의 교훈이라 할 수 있다. 전지에 있어서 불필요한 가지는 과감하게 잘라 내어야 하는데, 나무의 주인은 그 동안 키운 나뭇가지가 아까워서 함부로 잘라내지 못한다. 이럴 경우, 남은 가지 숫자가 많아지고 가늘게 되어 나무가 볼품이 없어진다. 특히 과일나무의 경우 가지 하나를 잘라내면 과일 대여섯 개는 포기하는 셈이므로, 잘라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애매한 경우 작업자는 가지를 붙잡고 고민하다 결국 자르지 못한다. 이렇게 되면 열매숫자는 많아지는 대신, 과일의 크기가 작아지고 상품성이 떨어져 경제성, 효율성이 낮아진다. 결국 과수원의 일만 늘어나고 과일은 제값을 받지 못해 농부는 손해를 보게 된다. 예로부터 과일나무 전지는 주인이 직접 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는 말이 이래서 생겨난 것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눈앞의 조그만 것을 추구하다 나중에 큰 것을 놓치는 것이 인간이거늘, 문제는 이러한 인생의 진리를 알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데 있다.

인생은 편도승차권(one-way ticket)을 쥐고 열차에 승차한 승객이다. 한 번 출발한 기차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기차는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 달리고 있다. 어느덧 내 머리에는 하얀 서리가 내리고, 얼굴에는 깊은 골짜기가 패였다. 지금까지는 남의 말을 듣고 그냥 지나쳤으나, 앞으로는 그것을 이해하고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 각오로 금년에는 소나무와 과일나무의 가지를 대부분 잘라내어 몽땅나무(?)로 만들어 버렸다. 비록 이 행동이 작심삼일(作心三日) 아니 작심일년(作心一年)이 될지언정, 일단 남의 말을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훗날 우락부락한 남성미를 뽐내는 소나무와 호박만한 감이나 복숭아가 열리는 과일나무를 기대하면서...

전지작업을 끝낸 정원의 풍경은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마음 속에 어지럽게 뻗어 있는 욕심이라는 가지들을 잘라낸 것 같아 후련하다. 내년 봄이 되면 정돈된 나뭇가지에서 또다시 잔가지가 돋아날 것이다. 내 마음 속 역시 시간이 지나면 잔가지로 채워질지 모른다. 그 때마다 전지작업이 가르쳐 주는 교훈을 마음 깊이 새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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