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맨몸으로 겨울을 나는 농작물

by 여송

도회지에서 직장을 다니면서 농촌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나이가 지긋하고 은퇴를 앞둔 사람들일 게다. 특히 어렸을 때 농촌에서 자랐거나, 그곳 생활을 경험해 본 사람들이 농촌에서의 삶에 관심이 많다. 그들에게는 시골서 농사짓던 과거에 대한 향수가 머릿속에 잠재의식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농촌서 자라 도시에서 대학 다니다가 아직까지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나 역시 농촌 생활에 대한 애착이 많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시골 고향에는 조상 대대로 물려오던 시골집과 농토가 조금 남아 있다. 조상의 혼이 서려 있는 집과 농지를 관리하는 데는 애로점이 따르지만, 고향에서의 농촌 생활은 타지 시골에서의 그것과 심리적, 정서적으로 다르다. 고향집 주변의 산하에는 어렸을 적 추억이 아직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젊었을 때는 시골 생활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나마 시골에 어머님이 계실 때에는 어머니를 뵈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수시로 고향을 방문하였으나, 어머님 가신 이후로는 방문이 뜸해졌다. 그러던 것이 나이가 들어가고 직장에서의 은퇴가 가까워짐에 따라 점차 고향의 농촌을 찾는 기회가 많아졌다.

최근 들어 농촌을 자주 찾게 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시간적 여유를 들고 싶다. 자식들은 각자 독립하여 자신들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고, 직장에서의 업무강도도 젊은 시절만큼 강하지 않다. 은퇴를 하고 나면 이런 시간적 여유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주말이나 방학이면 가끔 농촌 고향을 찾는 나의 생활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고, 뭐 때문에 비싼 기름값, 통행료 들여가며 고생스럽게 거기까지 갔다 오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다. 인생살이가 그러하듯, 대부분의 일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혼재(混在)하기 마련이다.


시골 생활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어려운 일이 많다. 특히 겨울철 시골에서의 생활은 불편을 각오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점은 난방문제이다. 단독주택이 대부분인 시골집은 단열처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난방비도 많이 들어 실내에서도 춥게 지낼 수밖에 없다. 나의 고향집은 심야전기보일러로 난방을 하는데, 이 난방 시스템은 전기가 공급되는 저녁 10시부터 오전 8시 사이에 보일러의 물을 데워 열을 비축한 다음,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시간에 온수를 순환시키는 이른바 축열식 난방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보일러 용량도 크게 하고, 전기도 펑펑 사용하여 온수의 온도를 최대한으로 높여 한낮까지 따뜻하게 지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낮에 조금 따뜻하게 지내면 온수가 냉각되어, 오후나 초저녁에는 썰렁한 냉골에서 지낼 각오를 해야 한다.

도시에서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 느낀 점은 한국의 실정에는 아파트 주거문화가 최적이라는 것이다. 층간소음, 공동생활에서 오는 사생활 보호 등 문제점이 없지 않으나, 우리나라처럼 땅이 좁고 인구밀도가 높은 나라에서는 땅값이 비싸 아파트처럼 주택이 높게 올라갈 수밖에 없다. 아파트는 또 겨울철 난방비가 적게 들어 유지, 관리적 측면에서 또다른 경제적 효율성을 가져다준다. 우리 집의 천장은 윗집의 구들이 되다 보니, 자연적으로 천장에도, 그것도 공짜로 난방을 하는 셈이다. 아파트에서는 밤중에 위, 아래에서 데워진 구들장으로 인해 한낮에도 난방이 필요 없을 정도로 실내가 따뜻하다.


농촌에서의 겨울 생활이 춥다고 하나 겨울철을 나는 농작물 앞에서는 그런 소리를 할 계제(階梯)가 못된다. 그들은 영하 10도가 넘는 강추위 속에서도 꿋꿋이 겨울을 버텨 낸다. 이들의 얼굴에 아침마다 하얀 서리가 눈꽃처럼 피어나고, 몸뚱아리는 동장군에 꽁꽁 얼어 얼음 막대가 되어도 불평 한마디 없다. 다른 농작물이 씨앗으로 따뜻한 방에서 겨울을 나고, 어떤 작물들은 줄기나 잎은 떨쳐버린 채 뿌리만으로 땅 속에 숨어서 한겨울의 모진 추위를 피해가도, 그들은 맨몸으로 당당히 겨울 추위에 맞선다.

시골집 텃밭에는 마늘, 파, 시금치 등 월동 작물들이 겨울을 보내고 있다. 추운 겨울 아침, 추위에 오그리고 있는 이들을 보노라면 가슴이 저려 온다. 이들 앞에서는 나는 감히 춥다고 엄살을 부릴 수가 없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裸身)으로 간밤의 추위를 견뎌낸 그들에 비해, 전기보일러로 데운 온돌 위에서 두꺼운 이불을 덮고 한여름의 열기만큼 뜨겁게 밤을 지내야만 하는 인간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겨울을 나는 농작물들은 우선 파종시기가 다른 작물들과 다르다. 해마다 텃밭에 심는 마늘은 보통 10월 중순 경에 파종을 한다. 다른 작물들을 수확하는 가을철에 씨마늘을 심는 것이다. 파종된 마늘은 싹을 틔운 다음, 맨몸으로 오롯이 한겨울을 보낸 후, 다음 해 여름에 수확을 하게 된다. 소나무나 전나무, 주목, 구상나무 등과 같은 상록수들은 잎이 바늘 형태의, 이른바 침엽수로 진화하여 잎의 표면적을 줄임으로써 추위에 대비한다. 반면, 마늘은 이들과는 달리 넓적한 잎을 활짝 편 채로 겨울을 맞는다. 그정도로 이 작물은 추위에 강하다.

시골 텃밭에 해마다 마늘을 심는 이유는 이 작물이 여러가지 요리에 필수적인 양념이기 때문이다. 농가에서 마늘을 직접 경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부분의 음식에서 마늘을 넣기 전, 후의 맛이 확연히 달라진다. 생선찌개를 만들 때 다진 마늘을 한 스푼 넣으면 비린내를 제거해 주고, 국물 맛이 구수해지면서 맛의 깊이가 더해진다. 소불고기나, 돼지 두루치기 등 육류 요리 시에 마늘을 넣으면 누린내 등 잡내를 없애 주면서 산뜻한 맛이 난다. 쇠고깃국 끓일 때에도 마늘은 필수품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밥상에서는 빠지지 않는 김치에도 마늘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심지어 여름에 먹는 물김치에도 마늘은 듬뿍 들어간다.

파는 쪽파, 대파에 따라 파종시기가 다르다. 시골 텃밭에서는 주로 쪽파를 재배한다. 쪽파는 김장용 무, 배추 파종기인 처서(주로 8월 말) 무렵 파종한다. 파는 마늘과 달리 잎이 원통형으로 되어 있어, 잎이 넓적한 마늘보다는 추위에 견디기 쉽게 진화하였다. 원통형 잎은 표면적이 줄어들고, 잎 속에 상대적으로 따뜻한 공기도 저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파가 주로 양념으로 사용되는데 비해 쪽파는 김장김치, 파김치, 파전 등에 들어가기에 대파보다 용도가 다양하다. 쪽파 역시 음식 요리 시 양념으로도 많이 사용된다. 소설가 김훈은 라면을 끓일 때 파를 넣으면 파의 독특한 향기가 나고, 약간의 단맛을 내면서 청량감을 더해준다고 하였다.

시골집 텃밭의 양지바른 곳에서는 시금치도 자라고 있다. 이 작물은 봄과 가을에 파종하는데, 월동 시금치의 파종 시기는 9월 말부터 10월 초 사이이다. 이 채소 역시 넓적한 잎을 가지고도 추위에 잘 견딘다. 시금치는 주로 나물로 요리를 하며, 쇠고기 등 불고기나 볶음요리에 양념으로 쓰이기도 한다. 추운 겨울에 자라는 시금치는 뿌리에서 단맛이 난다. 예로부터 야채를 구하기 힘들었던 겨울철, 조상들의 식탁을 녹색으로 풍성하게 해 주던 일등공신이다.

지금은 거의 재배하지 않아 농촌에서 보기 힘들어졌지만, 겨울을 나는 대표 농작물은 뭐니 뭐니 해도 보리였다. 보리는 벼 수확이 끝난 가을 무렵부터 논과 밭에서 재배하던 우리의 주식(主食)이었다. 한겨울 들판에서 하얀 눈을 뒤집어쓴 채 파랗게 솟아나 있는 보리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농촌 사람들의 삶 그 자체였다. 여름철 거둬들인 보리는 벼가 수확되는 가을까지, 이른바 보릿고개를 넘어야 하는 농부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생명의 끈이기도 하였다. 예전의 조상들은 또한 당뇨병에 걸리면 보리밥으로 생명을 연장해 나가곤 했다.

한겨울, 파나 마늘을 뽑아 보면 줄기가 온통 꽁꽁 얼어붙어 얼음 막대기처럼 차고 단단하다. 이것은 생명이 있는 식물이라기보다 무생물인 나무 꼬챙이에 가깝다. 봄이 되어 날씨가 따뜻해지면 이런 차가운 얼음덩어리에서 새싹이 돋아난다. 이것은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이다. 한겨울의 추위를 이겨 내는 이들의 몸에는 강추위 속에서도 자신을 보호하고, 그들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강력한 물질이 생성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과학적으로 검증해 보아야 하겠지만, 이들에게는 다른 농작물에는 없는 어떤 신비한 물질이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텃밭에서 겨울을 나는 이들 작물이 대부분 건강식품에 해당한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닌 것 같다. 우선 마늘은 단군신화에도 등장할 정도로 우리 민족에게는 신성시되는 존재였다. 오늘날에는 마늘의 효능이 과학적으로 밝혀져, 미국 "타임(Time)"지는 이 농작물을 세계 10대 건강식품으로 선정할 정도이다. 마늘이 정력이나 원기를 보하는 강장제라는 것은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알려져 있다. 마늘 속의 알리신은 강력한 살균·항균 작용을 하고, 소화를 돕고 면역력도 높이며,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춘다.

파 역시 비타민A와 C, 철분 등의 무기질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 파에는 마늘과 같이 비타민 B1을 활성화하는 알리신도 들어 있다. 한방에서는 파가 몸을 따뜻하게 하여 열을 내리고 기침이나 담을 없애주며 감기에도 좋다고 알려져 있다.

시금치 또한 마늘과 함께 세계 10대 슈퍼푸드에 들어갈 정도로 건강식품이다. 인기 애니메이션 "뽀빠이"에서 주인공이 시금치를 먹으면 힘이 세어진다는 내용은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시금치에는 수산(蓚酸), 사과산, 구연산, 및 비타민 C가 채소 중에서 제일 많이 들어 있으며, 비타민 B1, 비타민 B2, 나이아신, 엽산, 사포닌 등도 함유되어 있다.

지금은 우리 주위에서 잘 보이지 않지만 보리 역시 세계 4대 작물 중 하나이다. 최근, 보리의 생리활성 기이 재조명되면서 보리를 이용한 가공 식품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건강을 위하여 보리밥 전문식당을 찾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보리는 쌀에 비해 소화가 빨라 쌀밥 50g을 소화하는 데 1시간 30분이 걸리는 반면, 보리밥은 같은 시간에 두 배인100g을 소화시킨다. 보리의 식이섬유인 '베타글루칸'은 대장에서 담즙과 결합한 뒤 몸 밖으로 배설되면서 혈중 지질 수치를 낮추고 혈당 조절에도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한겨울 추위 속에서도 텃밭의 마늘과 파, 시금치들은 꿋꿋이 버티고 있다. 이들의 강인한 생명력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더불어, 이들의 몸에는 강추위 속에서도 생명을 지탱해 주는 신비의 명약이 존재할 거라는 데 대해 믿어 의심치 않는다. 혹독한 환경에서 자라난 인간이라야 삶을 살아가는 지혜와 인내를 얻을 수 있으며, 이렇게 성장한 사람만이 역경과 고난을 헤치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한겨울의 이 농작물들은 몸소 가르쳐 주고 있는 듯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겨울철의 시골 경로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