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마을은 7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마을 앞쪽으로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고, 들판 한가운데로 제법 큰 강이 휘감아 흐른다. 동네의 남쪽과 서쪽에는 야트막한 야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서 아늑한 느낌을 준다. 비록 마을 전체가 북쪽으로 향하고 있어서 겨울철에는 다소 썰렁하고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감돌기는 하지만...
서쪽 산 너머에는 낮은 골짜기가 펼쳐지고, 골짜기 양쪽으로 좁고 기다란 다랭이 밭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골짜기 중심부를 따라 조그만 개울이 이어져 있다. 그곳에서는 태고 때부터 개울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물은 계곡 주변의 논과 밭에 농업용수로 공급되어 농작물의 목을 축이면서 그들의 생존을 책임지고 있다.
깊숙한 골짜기의 외딴 지역에 버려진 폐가 한 채가 쓸쓸하게 서 있었다. 이엉으로 엮은 초가지붕은 썩어 내려앉아 곳곳이 움푹 파였고, 그 위로 이름 모를 새까만 버섯들이 돋아나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흙과 짚을 섞어 바른 벽면은 곳곳이 떨어져 나가 군데군데 휑한 구멍이 뚫렸다. 문짝도 없는 부엌에는 그을음이 남아 있어, 이곳이 밥을 짓고 군불을 때던 장소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아궁이 속에 남아 있던 한 줌의 재는 가난과 고독 속에서 새까맣게 타버린 집주인의 가슴이었다. 울타리도, 마당도 없는 집 주변에는 잡초들이 무성하여 이 집이 주인 없는 집임을 보여주었다. 가족들의 생명수를 공급하던 집 앞의 우물은 아직도 물이 샘솟고 있어 옛 주인이 돌아올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듯하였다.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소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1939)는 대공황으로 인한 미국 농민들의 처참한 생활상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 톰 조드네 가족은 오클라호마에서 남의 땅을 빌려 생계를 꾸려나가는 가난한 소작농이었다. 몇 년간에 걸친 가뭄과 모래폭풍으로 조드 가족은 은행 빚을 갚을 수 없어 살던 집으로부터 쫓겨나게 된다. 그들은 꿈과 희망을 안고 풍요의 땅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기로 결심한다.
조드 가족은 농기구와 가재도구를 헐값에 처분하고 그 돈으로 낡은 중고차를 구입한다. 그는 그 차를 트럭으로 개조하여 열대여섯 명이나 되는 식솔들을 이끌고 '축복받은 땅'으로 향한다. 그곳까지의 여행은 험준한 로키 산맥을 넘고, 죽음의 모하비 사막을 건너야 하는 장장 2,000마일의 목숨을 건 여정이었다. 고난의 행군 도중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톰의 형은 말없이 사라지며, 임신한 여동생의 남편은 혼자 살겠다고 달아나 버린다.
모진 고생 후에 도착한 캘리포니아는 그러나 더 이상 황금의 땅 엘도라도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도 아니었다. 그곳은 대지주의 노동력 착취가 만연한 또 다른 고통의 땅이었던 것이다. 조드네 가족들처럼 목숨을 걸고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좌절의 빛이 떠올랐고, 굶주린 사람들의 눈에는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분노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존 스타인벡은 하루아침에 집과 땅을 잃고 머나먼 타향으로 이주해야 했던 조드 가족을 통해 참혹했던 당시 이주 농민들의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난에 허덕이면서도 끝까지 인간의 존엄성은 잃지 않으며, 여전히 희망의 가능성을 안고 꿋꿋이 살아감으로써 휴머니즘을 실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향 근처 골짜기에 외로이 서 있는 폐가의 최초 주인은 젊은 부부였다. 그들은 인적이라고는 없는 이곳에서 고구마와 감자를 심고 가꾸면서 어려운 생활을 이어 왔다. 두 사람은 때때로 산마루를 넘어오는 미풍에 이마의 땀방울을 씻었고, 주위의 산새 소리를 음악 삼아 하루의 피로를 풀곤 했다. 한겨울에는 먹이를 찾아 그들 집 주변까지 내려온 산토끼와 고라니들을 벗 삼아 기나긴 겨울을 견디어 내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칠흑같이 어두운 여름밤에는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밤하늘의 별을 세며 지루하고 무료한 밤을 보내기도 했다. 비록 풍족하지 않은 삶이었지만, 두 부부는 외딴곳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가난과 고독함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는지 어느 날 집과 전답을 처분하고 살림살이를 정리하여 도시로 떠나고 말았다. 그들도 톰 조드네 가족처럼 부푼 꿈을 안고 새로운 세상을 찾아 떠난 것이다. 그들이 떠나간 후에 단란했던 그들의 보금자리는 곧 폐허가 되었다. 하루의 일을 끝내고 고단했던 몸을 뉘었던 안방은 길고양이들의 숙소로 전락한 지 오래된 것 같았다. 초가지붕 위로 하얀 연기를 늘어뜨리던 집 뒤편의 굴뚝에서는 냉기만 흐르고 있었다.
피땀으로 일군 집 주변의 문전옥답은 무성한 황무지로 변하여 이곳이 논밭이었는지 구분하기조차 어려웠다. 파란 고구마 잎으로 뒤덮였던 집 앞의 밭에는 개망초가 군락을 이루었고, 하얀 감자꽃이 만발했던 뒤뜰에는 억새풀이 그야말로 억세게 자라나고 있었다. 집 주변에서 맑은 목소리로 노래하던 새들도, 먹이를 구하기 위해 집 주위를 배회하던 야생동물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 폐가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지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찾은 그곳은 또다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새 주인은 집 주변의 밭을 과수원으로 개간하였고, 높게 자라난 배나무들이 집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허물어진 폐가는 다시 손을 보아 농사용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썩은 이엉을 걷어낸 지붕에는 함석이 자리하였는데, 이마저 빨갛게 녹슬어 시간의 흐름을 대변해 주고 있다.
한겨울의 차가운 북풍을 막기 위해 북쪽 창문에 붙여 놓았던 비닐 조각도 세월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삭아내려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무너져 내린 흙벽은 시멘트를 발라 비바람은 막을 수 있게 해 놓았으나 곳곳에 금이 갔다. 벽을 받치고 있던 축대는 무너져 내렸고, 지붕 위에 걸쳐 있던 서까래는 썩어 내려앉았다. 잡초들은 주인이 없는 틈을 타 뒷마당을 점령한 지 오래된 듯하다. 벽을 타고 기어오르는 잡초는 옛 주인의 끈질긴 생명력을 상징하고 있다. 집 앞에 자리한 우물에는 호스가 연결되어 있어, 옛 주인이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인기척이 없는 집 가까이로 다가서니 목줄에 묶인 개가 그의 본연의 임무인 경계업무에 충실하면서 사납게 짖어댄다. 그의 눈동자는 산토끼의 그것에서 나타나는 순수함 대신 증오심으로 불타올랐고, 날카로운 송곳니에는 고라니의 가지런한 앞니에서 느낄 수 있는 온순함 대신 살벌함이 베여 있다.
비록 옛 모습은 많이 사라졌지만, 산골짝의 폐가는 옛 주인과 주변의 추억을 되살리기에 충분하다. 이 집의 원주인의 생사는 알 수 없지만, 살아있다면 60대 중반쯤 되었을 게다. 그들이 30여 년 전 이 집을 버리고 찾아간 도시가 그들에게는 샹그릴라였는지, 절망과 고난의 땅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들의 눈에는 객지 생활의 고달픔으로 인한 분노의 포도가 더 이상 자라나지 않았기를 바랄 따름이다.
고향 서쪽의 산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는 이 외딴 폐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는 상징물이다. 이것은 우리 세대가 세월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간 마지막 지점에서 예전의 한 조형물이 파편이 되어 현재로 떠내려 온 것이다. 그것은 시간을 뛰어넘고 후세들의 손을 거쳐 현재까지 남아있는 우리의 삶의 결정체(結晶體)인 것이다.
삶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인생은 각자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난 이상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 타향에서 인생의 후반기를 살고 있을 폐가의 첫 주인도 그들의 새로운 케렌시아에서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