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길목에서

by 여송

해가 바뀐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2월 중순에 들어서니 바람의 방향도 북풍에서 남풍으로 바뀌었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 덕분에 공기의 감촉 또한 달라졌다.


산과 들에는 바야흐로 봄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맨 먼저 봄소식을 알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화이다. 담벼락 밑에서 엄동설한을 이겨낸 매화나무 가지에는 도톰한 꽃봉오리가 맺혔다. 조만간 꽃망울을 터뜨릴 기세다. 혹한과 겨울가뭄으로 비쩍 말라 생기라고는 없는 나뭇가지도 봄이 되면 어김없이 꽃을 피우는 것은 생명의 신비다.

집 앞 느티나무 위에는 까치 한 쌍이 보금자리를 마련하느라 분주하다. 그들은 도처에서 물어다 나른 나뭇가지와 지푸라기로 그들의 둥지를 꾸미고 있다. 앞으로 태어날 새 생명을 위하여 이들은 오늘도 분주히 날갯짓을 하고 있다. 영겁의 세월 동안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 생존의 법칙이다.


한갓 포근해진 날씨에 거위들도 봄나들이에 나섰다. 한겨울 내내 우리 속에서 갇혀 지내다가 모처럼 나선 야외 나들이이다. 평소 뒤뚱거리는 발걸음이 오늘은 오히려 날렵해 보인다. 맨 앞에 선 대장을 따라 일렬로 행진하는 모습이 유치원의 꼬마 녀석들을 닮았다. 화창한 날씨에 기분이 좋은 듯 모두가 경쾌한 리듬으로 꿱꿱거린다. 봄기운이 감도는 대지로 나선 그들은 넓적한 부리로 흙을 파헤치거나 나무둥치를 쪼면서 다가오는 봄을 맞이하고 있다.


언덕 아래의 실개천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시냇물도 따스한 봄바람에 녹아내리고 말았다. 가느다란 물줄기가 졸졸 소리를 내면서 바위틈을 따라 흘러 내려간다. 저만치 물가에는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시냇물로 목을 축이고 있다. 아직도 누렇게 메마른 산과 들과는 달리, 냇가에는 벌써 파아란 새싹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이 냇물은 주위의 생명체들을 겨울잠에서 깨우면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길 가의 보리밭에도 어김없이 봄은 찾아왔다. 맨몸으로 모진 추위에 맞서면서 누렇게 말랐던 보리 이파리도 파릇파릇 생기를 되찾았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먹을 것을 찾아 나섰던 거미 한 마리가 인기척에 놀라 보리 속으로 숨는다. 아무래도 먹이사냥 하기에는 철이 너무 이른 것 같다. 보리는 보리밥, 보릿고개 등 우리 조상들의 고난을 상징하던 작물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거의 사려져 버린 보리를 보니 반갑기 그지없다.


양지바른 언덕 위에는 쑥이 고개를 내밀었다. 비록 봄이 가까이 왔건만, 아직까지 쌀쌀한 날씨에 잔뜩 움츠린 모습이다. 불그스름한 줄기 끝에 매달린 은백색의 잎사귀가 초봄의 햇살을 받아 밝게 빛난다.


봄에 처음 돋아나는 보드랍고 연약한 쑥을 옛날 사람들은 새 쑥이라고 하였다. 이 새 쑥으로 국을 끓이면 부드러운 식감과 강렬한 쑥 향기를 맛볼 수 있다. 이 시기를 지나쳐 웃자란 쑥으로 끓인 국은 쑥 향기는 거의 없고 쓴맛이 강하게 난다. 이러한 쑥의 생태적 특성으로 인해 일 년 중 쑥국을 먹을 수 있는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 것이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다.


이양하는 신록 중에서도 봄바람을 타고 새 움과 어린잎이 돋아 나오는 유년의 신록을 가장 좋아하나, 이 유년의 신록은 불행히도 짧다고 하였다. 민태원은 인생에 따뜻한 봄바람을 불어 보내는 것은 청춘의 끓는 피며, 청춘은 인생의 황금시대라고 했다. 이 청춘시대 역시 우리 인생에 있어서 극히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는다.


오래가지 않으리 ; 사랑과 욕망과 증오는,

우리, 죽음의 문 지나고 나면

그것들, 우리에게 더는 없으리니

오래가지 않으리 ; 와인과 장미의 시절도

어느 어렴풋한 꿈에서

우리의 길 잠시 나타났다, 이내

어느 꿈속에서 닫히리니


- 오래가지 않으리(They are not long), 어니스트 다우슨(E. Dowson) -


새로이 돋아난 쑥을 보자마자 어릴 적 먹었던 쑥국에 대한 기억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 메뉴를 맛볼 수 있는 짧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따스한 봄볕 아래에서 쑥을 캐기 시작했다. 잠시 만에 바구니가 봄기운을 가득 머금은 새싹들로 가득 찼다.


오늘 저녁 메뉴는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쑥국이다. 나는 이 한 그릇의 음식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아울러 쑥국에서 풍기는 향긋한 봄 내음을 맡으며 다가오는 봄날을 맞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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