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은 생명체 하나 없는 사막처럼 황량하다. 이따금 까악 까악 소리를 내며 하늘을 가로지르는 까마귀 떼들이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린다. 여름에는 짙푸른 녹색 이파리로, 가을에는 누런 열매로 가득 찼던 시골집의 텃밭도 휑하기는 마찬가지다. 몸뚱이의 대부분은 잘려 나가 버린 채, 어린아이 손가락 마디만큼 남은 콩과 깨의 그루터기들이 이곳이 한때는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텃밭 아래로 펼쳐져 있는 앞마당에는 기다란 곤충 한 마리가 초겨울의 따사로운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누워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놀랍게도 사마귀였다. 요란스러운 인기척에 미동도 않는 걸 보니 죽은 것 같다. 한여름에는 초록빛으로, 들판이 황금색으로 물든 가을철에는 갈색으로 피부의 색깔을 바꾸어가며 까치나 뱀 같은 천적의 눈을 피해 왔건만, 차디찬 겨울 앞에선 그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 같다. 괴기영화에 등장하는 괴물을 닮은 역삼각형 모양의 그의 머리는 맥없이 땅바닥에 드러누워 있다. 머리 끝 부분에서 부리부리하게 빛나던 눈동자는 초점을 잃었다. 권투선수처럼 날쌔게 잽을 날리던 앞다리는 마치 기도라도 하듯이 머리 아래로 가지런히 모였다. 기다란 자루처럼 불룩하게 부풀어 오른 배는 탄력을 잃고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쓰러져 있다. 용수철보다 탄탄하던 뒷다리는 바람 빠진 막대풍선처럼 힘없이 몸통에 매달려 있다.
다소 징그럽게 생긴 동물이지만, 어릴 적부터 우리는 이 사마귀와 가깝게 지내곤 했다. 위생상태가 불량했던 옛날, 손발에 콩알처럼 툭 솟아오른 또 다른 사마귀는 아이들에게 흔하던 피부병의 일종이었다. 곤충인 사마귀의 입을 변형된 피부조직인 사마귀에 갖다 대면 신기하게도 곤충 사마귀는 날카로운 이빨로 피부의 사마귀를 뜯어먹었다. 다시 말해서 곤충 사마귀가 피부 사마귀를 잡아먹은 것이다. 잡아먹힌 피부 사마귀는 때로는 괴사 되어 사라지기도 했다. 당시로는 이와 같은 사마귀로 사마귀를 잡는 방법이 그 피부병에 대한 유일한 치료법이었다. 오랑캐를 이용하여 다른 오랑캐를 다스린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혼란을 야기시킴에도, 전혀 다른 속성의 두 가지 사물에 대해 동일한 명칭인 '사마귀'가 사용되고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사마귀는 곤충계의 제왕이다. 잠자리나 메뚜기와 같이 덩치가 큰 곤충도 사마귀의 강력한 턱과 날카로운 이빨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이러한 신체적 특성 때문인지 사마귀는 웬만한 동물은 무서워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기보다 천배, 만 배나 덩치가 큰 인간이나 소, 말 등에게도 쉴 새 없이 앞다리로 공격하면서 물러서지 않는다.
당랑거철(螳螂拒轍)은 이러한 사마귀의 속성을 잘 나타내는 고사성어이다. 이는 중국 제(齊) 나라의 장공(莊公)이 사냥을 나가는 길에, 사마귀 한 마리가 앞다리를 들고 수레바퀴로 달려들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부하로부터 사마귀는 앞으로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설 줄 모르며, 한결같이 적에 대항하는 놈이라고 전해 들은 장공은, 그 곤충이 사람이었다면 천하에 비길 데 없는 용사였을 것이라며 그 용기에 감탄하여 수레를 돌려 사마귀를 피해 가게 했다고 한다.
어릴 적 친구로 지내던 사마귀가 싸늘하게 식은 채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 한 구석에서 연민의 정이 솟아난다. 사마귀의 죽음과 함께 이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불굴의 도전정신마저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 풍요롭고 안락한 물질문명 속에서 인간은 나날이 나약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인류 발전의 원동력인 모험심과 패기는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사마귀를 상징하는 무모함이라는 단어에는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가 풍기지만, 이 동물의 끝없는 도전정신은 높이 살 만하다. 공자는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거기에 나의 스승이 있다(三人行 必有我師焉)고 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 비하면 하찮은 미물에 불과하지만, 사마귀의 지칠 줄 모르는 도전정신은 나약한 인간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 물론 지나친 무모함은 경계해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