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았던 하루

by 여송

깊은 산속에 딸기가 빨갛게 익었다.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에서, 누구 하나 보아주는 사람 없건만 딸기는 흐드러지게 열매를 맺었다. 마치 딸기나무에 화려한 꽃이 활짝 핀 듯하다. 비록 실제의 딸기 꽃은 빨갛지 않고 하얀 색깔을 띤 소박한 꽃이지만. 1년생인 초본식물에서 열매를 맺는 시중의 딸기와는 달리, 이 딸기는 다년생인 딸기나무에서 해마다 열리는 산딸기이다. 누구 하나 심고 가꾸지 않았건만, 이 식물은 홀로 성장하여 이렇게 훌륭한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냥 지나치면 섭섭해할까 봐 딸기나무로 다가간다. 상대방이 별로 반겨주는 것 같지 않는데도 이렇게 생각하는 건 나의 뒤틀린 에로티시즘인가? 그보다는 어렸을 때의 추억이 나로 하여금 이곳으로 발길을 돌리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여름철이 되면 어머니는 배고픈 자식들을 위해 종종 야생의 산딸기를 따서 딸기잼을 만들었다. 밀가루와 막걸리를 섞어 쪄낸 술빵에 이 딸기잼을 발라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었다. 그 빵에서 풍겨나던 약한 술내음과 딸기잼의 달콤한 맛은 지금까지도 뇌리 속에 깊숙이 박혀 있다.


잘 익은 열매를 몇 개 따서 맛을 보니 새콤달콤한 맛이 예전 그대로이다. 이 맛은 나를 순식간에 수십 년 전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게 한다. 이미 진수성찬을 즐기고 있던 개미와 진딧물 대열에 나도 본격적으로 합류했다. 코끼리만 한 덩치를 가진 동물이 끼면 우린 어떡하느냐는 불평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듯하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했던가. 달콤한 과일로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나니 이젠 이 귀한 자연산 딸기들로 잼을 만들어 두고두고 먹었으면 하는 욕구가 일기 시작한다. 죽고 나면 북망산천 한 줌의 흙이 될 몸이지만, 아직도 눈앞의 사소한 재물을 아까워하는 것이 인간이다.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그 속에다가 넓적한 칡잎을 깐 후 본격적인 딸기 채취에 들어갔다. 가시에 찔리고 비탈길에 미끄러지면서 한 시간 정도 작업을 하니 딸기로 가득 찬 모자가 묵직해졌다. 남은 딸기들은 다른 생명체들을 위해 남겨두어야지 하는 표리 부동한 논리를 앞세워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딸기잼을 만들 때의 기억을 되살려서 잼 만들기에 도전하였다. 먼저 갓 따온 딸기를 으깨어 채에 받친 후 딸기과즙과 씨앗을 분리하였다. 마트에서 파는 일반적인 딸기와 달리, 산딸기는 씨앗이 딱딱하여 이것을 제거하지 않은 잼은 식감이 좋지 못하다. 과즙이 어느 정도 걸러진 찌꺼기는 올이 성긴 가제나 삼베 수건에 싸서 꼭 짜주면 남은 과즙을 대부분 걸러낼 수 있다. 그다음엔 짜낸 과즙을 냄비에 붓고 설탕을 섞어야 한다. 넣는 설탕의 양은 취향에 따라 다르며, 대체로 딸기 무게의 1/4부터 절반 정도까지이다. 딸기 자체가 단맛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설탕을 너무 많이 넣지 않아야 한다.

냄비를 가스 불 위에 올려놓고 과즙을 졸이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더운 날씨에 뜨거운 불 앞에서 해야 하는 이 일은 잼 만드는 과정 중 가장 지루하고 힘든 작업이다. 집안의 모든 창문을 열어놓았지만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하지만 마당 한가운데 솥을 걸어놓고 한여름의 뙤약볕 아래에서 잼을 만들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불평할 처지가 못 된다. 과즙을 한 시간 정도 졸이니 드디어 잼이 끈적끈적해지기 시작했다. 잼이 식으면 예상보다 단단해지기 때문에 너무 많이 졸이지 말아야 한다. 20여 분을 더 끓인 끝에 불을 끄고 식혀 최종적으로 수제(手製) 딸기잼을 완성하였다. 달콤하면서도 산딸기 향이 감도는, 그럭저럭 괜찮은 작품인 것 같다.


작업을 끝내고 거실 소파에 앉아 땀을 식힌다. 저 멀리 산봉우리에는 하얀 구름이 걸려 있고, 산등성이를 넘어 불어오는 남풍이 시원하게 다가온다. 집 뒤의 대나무 숲에서는 온갖 새들이 모여 경쾌한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때를 맞춰 건너편 느티나무 위에 있던 매미들이 일제히 합창을 한다. 마치 속세를 떠나 선경(仙境)에 든 느낌이다. 채근담(菜根譚)에 이르기를 마음의 본체가 밝으면 어두운 방안에도 푸른 하늘이 있고, 생각 머리가 어두우면 대낮에도 도깨비가 나타난다고 했다.


지금 내 앞에는 서너 시간의 노력 끝에 완성된 딸기 잼 두 병이 놓여있다. 이들은 시간을 거슬러 유년 시절에 이르는 여행길로 나를 인도한다. 나는 이 잼에서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어머니의 자식사랑을 다시금 깨닫는다. 이 잼들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추억의 매개체요, 인간의 마음을 순화시키는 정화제(淨化劑)이다.

오늘은 정말 재수가 좋은 날이다. 우선 돈 한 푼 들이지 않고(잼 제조에 들어간 설탕과 가스요금은 무시할 정도) 딸기잼 두 병이 생겼다. 행복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행운과 어머니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의 여유도 얻었다. 기나긴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영창에도 가지 않고, 급식당번을 속여 죽 한 그릇을 더 먹어 운이 좋았다고 행복해하는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보다도 훨씬 운수 좋았던 날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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