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의사를 나누는 잘못된 이분법은, 수술은 잘하지만 환자에게 싸가지 없는 의사와 실력은 좀 떨어지지만 가슴이 따뜻한 의사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환자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아픔을 공유하려 애쓰는 의사가 수술을 못하거나 전문 지식이 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환자의 안위보다 자신의 승진과 주목을 받는 데 힘쓰는 의사들이야말로 밤에는 윗선에 줄 대느라 최신 학회지도 못 보고 수술도 덜 해서 실력이 퇴보할 가능성이 훨씬 높지 않을까요?”
-. 황승택, 2018 『저는, 암병동 특파원입니다』
과 사무실 한구석에 칭찬카드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병원에서 받아서 보내준 카드들인 듯하다. 수술받은 환자와 보호자들이 남기고 간 짧은 엽서인데, 내용들이 참 따뜻하다. 아픈 몸을 따스한 손길로 잘 치료해주고, 아픈 마음을 잘 위로해주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으로 감동받았다는 사연들. 수십 장 넘기면 내 이름도 하나쯤은 나오겠지 했는데, 역시나 한 장도 없다. 몇 년 전에 탈장 수술을 받은 어떤 할아버지가 한 카드를 남기고 가셨는데, 한자를 너무 많이 쓰셔서 칭찬인지 민원인지 모르고 해독 불가해했던 경험이 있긴 하다. 카드를 넘기다 보니 칭찬받을 만한 사람은 계속 받고 있는 것 같다. 카드 하나 못 받는 내 품행에는 확실히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다가, 내 칭찬은 특별히 인터넷으로만 오는 것은 아닐까 자위해보기도 한다. 따뜻함이 부족하다면 가운 주머니에 핫팩이라도 넣고 다니면서 배를 뜨겁게 만져드려야 하는 미봉책이 우선 떠오른다.
『저는, 암병동 특파원입니다』라는 제목의 책은, 30대 후반의 남자 기자가 백혈병에 걸려 암병동에서 치료받고 있는 투병기다. 입원, 퇴원, 재발, 이식 수술 등의 지난한 과정을 페이스북을 통해 연재를 했다고 한다. 작가가 기자라서 그런지 우리 의료시스템의 한가운데를 관통해가는 여정의 눈길은 예리하다. 따뜻한 의사와 실력 좋은 의사로 양분하는 이분법은 틀렸다는 부분에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작가의 논지는 ‘따뜻한 의사가 결국 실력 좋은 의사다’라는 말인데, 고개를 끄덕이다가 나는 그 두 개의 축 중 어떤 것에도 가깝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이분법이 틀렸다면 사분법은 어떨까? 그림처럼 x축에 ‘따뜻함’, y축에 ‘실력’이라는 변수를 놓아보자. 작가가 말하는 최고의 의사가 둘을 다 갖춘 A 그룹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 이견이 없을 것이다. 두 가지가 모두 없는 의사가 F라는 데도 동의가 쉽다. 실력이 있지만, 따뜻함은 부족한 의사를 B, 그 반대를 C라고 했을 때 해묵은 논쟁이 시작된다. 의사들은 대개는 B가 C보다 낫다고 생각하는데, 환자들은 그 반대를 선호하는 것 같다. C 그룹의 의사를 A 그룹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B 그룹의 의사를 F로 경멸하기도 한다. 물론 A급 의사들이 보기에는 둘이 무슨 차이가 있겠나?
문제의 뿌리는 ‘인성’이라는 것이 가르치기도 학습하기도 어렵다는 데 있다. 소크라테스 같은 성현도 골머리를 앓았을 정도로 골치 아픈 문제다. 군대에서 우리 단장님이 하신 수많은 말씀 중 한마디가 떠오른다. ‘우리 아들 군대에서 사람 만들어 주세요’라는 말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리도 없다고. 아니 집에서 20년이나 키운 부모가 사람을 못 만들었는데, 2년짜리 군대에서 사람을 만들어내라는 말이 말이 되냐는 말이다. 단장님 말씀대로 군대의 본질은 전쟁을 하는 군인을 만드는 곳이다.
그럼 의대는 무엇을 하는 곳일까? 하루만 지나도 쌓여가는 의학 지식을 배우기에도 벅찬 시간이다. 의대를 졸업하고 수련의를 시작하는 20대 후반, 전문의를 시작하는 30대에도 인성이 좋아지는 기회가 있을까? 의사를 포함한 전 인류를 통틀어 인성이 좋은 사람은 또 얼마나 있을까? 요즘 젊은 의사들이(아니 내가 벌써 요즘 젊은것들..이라는 표현을 쓰다니 슬프다..) 인류 중 특별히 인성이 문제인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 분들은 성장 과정 중에 가족 외에 다른 사람과 눈을 맞추고 대화를 해본 경험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에게 설득이나 설명을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찌 보면 사회적인 성장을 할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다. 최근의 의대의 교육과정도 세상과 사람들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커리큘럼이 많이 도입되고 있어서 다행이다. 따뜻한 ‘정서적 교감’이 중요하다면, 전공의 수련 때부터라도 환자 옆에서 충분한 시간을 쓸 수 있는 환경과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대부분의 따뜻함은 삶의 여유에서 생길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