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진은 나와 눈을 맞추길 어려워하면서도 나에게만 이야기했다. 마치 캐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캐시와 나는 이런 모습을 관찰하고 농담으로 삼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지치기도 했다. 병원은 신체치료를 감 정을 돌보는 일에서 분리하며, 돌보는 사람을 부가적인 사치품인 양 취급한다. 옆에 있으면 환자에겐 좋지만 치료에 필수는 아니라는 것이다. 캐시와 나는 우리가 환자와 문병객으로 갈라지지 않도록 애쓰면서 힘든 시 기를 보내야 했다.”
_아서 프랭크, 《아픈 몸을 살다》
외래 진료를 하는 날에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환자는 물론이고 동반하는 보호자들도 만난다. 적게는 한 명에서 대가족이 오기도 한다. 우리나라 드라마를 시청할 때는 초반부에 복잡한 가족 관계를 재빨리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주인공에 얽힌 출생의 비밀을 미리 예상해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진료 시에도 동반한 보호자가 환자와 무슨 관계인지 빨리 파악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대략 넘겨짚다가 낭패를 보는 일도 허다하다. “어머니이신가 보죠?”라고 했다가 “저는 아내인데요”라는 답을 듣기도 하고, “아내 분이신가 보네요”라고 했다가 “저는 딸인데요”라는 대답이 돌아오는 당황스러운 경험도 많다. 머리가 흰 할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길래, “아버님이 많이 놀라셨겠지만...”이라고 했다가, “저는 남편입니다”라는 말도 들어봤다. 요즘은 겉으로 보이는 관계보다 한 단계 정도 낮게 불러보는 ‘방어 진료’를 고민하게 된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은 환자 한분만 진료실에 들어오거나 보호자가 동반한다면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연예인 패널처럼 가슴에 관계가 표시된 카드를 붙이면 좋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해 본다.
여러 보호자가 함께 설명을 들어도 그중에는 의견을 종합해서 결정하는 리더가 있다. 의료진 입장에서는 효율적인 환자 진료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직책이다. 그 사람이 이 자리에 없으면 오늘의 모임은 다 허사다. 6명이 20분간 설명을 잘 듣고는 정작 ‘수술 결정은 미국에 있는 아들과 상의해서 결정해야 한다’는 경우나 ‘회사일로 오늘 함께 못 온 가족에게 전화로 추가 설명을 부탁한다’는 식의 답변을 들으면,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 늘어진 스펀지밥처럼 책상 밑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절망을 느낀다.
의료법에는 환자가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상태라면, 보호자에게 반드시 설명을 해야 할 의무는 없다. 환자에게 직접 설명하고 환자가 서명을 하면 법적인 문제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환자의 의식이 혼미하다던가 활력 징후가 안정적이지 못한 경우에 이른다면, 환자 본인이 명확한 의사결정을 하거나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 현실적인 대화 상대로 부적합해지는 아이러니가 생기고, 자기 결정권은 무력화된다. 상태가 악화되거나 재수술을 해야 하는 등의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는 자연스럽게 보호자가 의사 결정의 주체가 된다. 결과가 좋지 못하게 끝난다면 잠재적인 법적 분쟁의 대상이다.
수술을 하는 날, 보호자들은 수술장 입구에서 이별 의식을 치른다. 이 의식은 애틋함과 회한이 겹쳐서 눈물로 마무리된다. 병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수술장은 대개 2층이나 3층에 있다.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11층에서 수술을 하는 것보다는 중력이 더 많이 미치는 지표면과 가까운 층에서 수술하는 것이 조금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보호자에게는 이런 낮은 층수가 1층과 지하에 있는 편의시설로의 접근성 측면에서 좋다. 큰 일을 치를 환자를 수술장으로 보내고 나면 가족들은 우선 식사를 하러 가는 것 같다. 음식을 넘기면서 미안함과 죄책감이 동시에 함께하는 시간이다. 개별자로서의 인간이 때가 되면 치러내야 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일 뿐이다. 간병도 힘과 여유가 있어야 버틸 수 있으니 보호자가 든든히 먹는 것도 환자를 위해서 장려할 일이다.
수술장 옆 대기실은 공항 플랫폼과 비슷한 풍경이다. 불편한 의자가 있고, 그 옆에는 잡지 몇 권이 비치되어 있으며, 벽면에는 대형 텔레비전이 걸려 있다. 또 다른 모니터에는 수술 진행 상황이 환자 이름의 가운데 글자가 가려진 채로 표시된다. 공항과 다른 점이 있다면 비행기가 지나다니는 풍경이 없고, 라운지 등의 편의시설이 없다는 것이다. 그 흔한 충전 장치도 없는데, 시설 사용료를 내지 않은 제삼자에게는 어떠한 편의도 제공하지 않겠다는 치사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환자와 보호자에게는 수술 예상 소요시간이 알려진다. 1시간, 2시간, 3시간, 4시간. 시간이 짧다면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라는 뜻이고, 시간이 길수록 어렵고 복잡한 수술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데, 이 수술 시간이 합병증의 빈도와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수술 시간은 짧아도 문제가 많이 생기는 수술도 흔하다. 예상 소요시간이 2시간이면 이별한 환자와 수술장 밖에서 재회하는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수술장 입구에서 준비하고 대기하는 30분, 수술방에서 마취를 하고 수술 준비를 하는데 필요한 1시간 남짓, 수술이 끝나고 회복실로 옮겨져 마취에서 깨어나면서 보내는 1시간 남짓을 더해야 한다. 2시간짜리 수술을 받는 환자가 실제로 수술장에서 보내는 시간은 5시간 정도인 셈이다. 집도의는 수술이 마무리될 즈음, 수술장 입구로 나와서 보호자에게 수술이 잘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런 세부 사정을 잘 모르는 분들은 2시간짜리 수술이 왜 5시간이나 걸렸냐며 따지기도 한다. 아주 어려운 수술이 예상보다 잘 끝났을 때에는 보호자에게 멋있게 설명하고 싶은데, 하필 이럴 때 보호자들은 대개 자리에 없다. 예정 시간을 아주 넉넉하게 입력해 놓는 ‘방어 진료’의 습관 탓인지도 모르겠다.
스마트폰을 할 줄 모르는 보호자들은 이 길고 초조한 묘한 죄책감으로 얼룩진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 늘 궁금하다. 대기실이라는 구렁텅이에서는 눈을 감고 여러 생각에 잠기거나 ‘수술 중’이라는 단어를 어떤 구원의 표식처럼 뚫어지게 오래 보고 있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에게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닥친 이 시련의 의미는 무엇일까? 왜 나는 저 사람이 건강할 때 더 잘해 주지 못했나? 아픈 가족의 고통을 어떻게 나눌 수 있을 것인가? 이번에 회복하면 훨씬 잘해주겠다는 생각도 들 것이다. 환자가 수술장에서 다시 생명을 이어간다면, 가족들은 대기실이라는 공간에서 가족이라는 인연의 의미를 다시 매만진다. 의무감으로, 회한으로, 새로운 다짐의 힘으로.
구렁텅이에 빠진 사람에게는 떨어지는 모래알 하나가 매정한 바위처럼 느껴지고, 이슬 한 방울이 가뭄에 내리는 단비처럼 반갑다. 그래서 정직한 말도 가끔은 냉혹한 일이 된다. 보호자를 불러 세울 때, 늘 그 부분을 조심하려고 한다.
“걱정 많이 하셨죠. 수술은 아주 잘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