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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깃글 Sep 10. 2021

이름이라는 이름

원슈타인 <당신이에요> 라이브를 보고

당신의 1


한국의 브로드웨이.

구로드웨이? 눈을 의심했다. 신도림역 2번 출구, 유럽이나 북아메리카 작은 도시 근처 십대들의 낙서라고 하기도 무언가 부족한 벽화. 벽화보다 더 무언가 칠해지는 내 머릿속. 이건 아니야. 구로구.. 구려! 행정구역들의 손길은 그 장소 본연의 가치를 알기 전에 한숨부터 쉬게 한다. 지난 주말 다녀왔던 포항의 영일대 해수욕장은 포라카이라고 부른다. 누군가는 그곳을 광안리 짭이라고도 했다. 광안리와 친근한 나에게 그곳은 하위 광안리로 남겨질 것 같았다.

포르투갈 포르투 근교인 아베이루를 갔을 때도, 여행 가이드 책과 블로거들에게 포르투갈의 베니스라고 불려졌다. 두 번째로 나열되는 순간 기대감과 함께 실망감을 선사한다. 이해를 돕기 위한 부연설명으로 남는 키워드라고 한대도 베니스라는 글자가 아베이루의 물 위로 둥둥 떠다닌다. 도시에 자그마한 운하가 있으면, 물이 곳곳에 펼쳐지고, 쪽배가 떠다니면 베네치아여야 하는가. 늘 그렇게 비교하는 가치는 무언가를 가둔다. 아베이루에서 만났던 하늘빛은 맑았고, 기타 치는 예술가의 코트는 반짝반짝 빛났고, 먹었던 문어요리는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문어였다. 아베이루는 아베이루였다. ‘나는 커서 내가 될 거야’ 어디에선가 마주치고 머릿속으로 줄을 백만 번 그었던 가사처럼, 맛도 글도 도시도 사람도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세상이다.

 

위하는 .

현재 책을 좋아하고 토론을 좋아하는 것 치고는 어린 시절 책을 많이 읽지 않았다. 오히려 도서관과 서점을 가면 화장실이 가고 싶어지는 기분 좋은 긴장과 설렘이 느껴졌고, 그것이 좋았다. 책 속 세계보다 책을 만지고, 들고, 이고 지고, 다시 떠나보내는 행위를 사랑했을지도 모르겠다. 책은 공부하기 싫을 때, 숙제나 시험이 다가와 우선순위로 밀려날 때 더 찾았다. 물론 해리포터는 예외다.

초등학교 2-3학년 때는 위인전이 인기였다. 친구 집에 놀러 가면 나열된 이순신, 세종대왕, 퀴리 부인, 파브르와 같은 이야기가 꽂혀 있었다.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유형의 질문이 인기였다. 위기를 잘 이겨냈거나, 훌륭한 업적을 이루어냈거나, 역사를 바꾸었거나, 변화를 일으켰다는 비범한 사람들보다 그 위인전을 읽을 수 있는 친구가 부러웠다. 나는 아인슈타인과 같은 사람이 될 거에요. 라고 똘망똘망 발표하는 친구의 목소리가 부러웠다. 엄마 우리 집에는 왜 위인전이 없어? 누군가를 존경하고 롤모델로 삼는 것이 위대해 보였던 나는 억지로 ‘헬렌 켈러’ 한 권을 구매했고, 억지로 나에게 끼워 맞추었다. 정말 우연히도 헬렌 켈러 위인은 나와 생일이 같았고, 장애를 딛는 그 과정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을 최대한 상상하며 나도 헬렌 켈러를 존경한다고 누군가에게 말했다. 20년이 지났고, 나는 나로 자라났다, 당연하게도.


서른이라는 이름.

‘내가 스무 살에 상상한 서른 살은 이건 아니야.’ 서른 동갑내기를 만나면 꼭 나누는 주제다. 2021년은 이 이야기만 하다가 끝나는 것만 같이 떠들어 댄다. 그러면 어떤 서른을 그렸던 거니, 너는? C가 되물었다. 보통은 시시껄렁한 어른 타령을 하다가 끝나는 대화였는데, C는 말을 이어갔다. 생각해봐, 고딩 때는 스무 살이 완전 멋있는 어른 아니었냐? 그러게. 참말 그랬다.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 바라보았던 중학생 선배들의 뒷모습은 든든해 보였다. 고등학생의 눈에는 교복을 벗고, 두꺼운 전공책을 들고 다니는 대학생 어른들이, 참 어른 같아 보였다. 과제를 학교에서 다 못해서 집까지 무거운 책을 이고 갔다가 다시 무겁게 학교로 들고 가는 뻔하고 흔한 현실이었는데도. 맞닥뜨리기까지의 상상력으로 버텼을 그 시간의 무게. 상상이 있기에 더 비교할 수 있는 현실. 결국 서른이든 마흔이든 그 모습을 상상하는 순간의 나일 뿐이었다. 전공 시험을 치고, 술값이 저렴한 곳에서 시끄럽게 술 게임을 하다가 막차를 뛰어 타 집에 헐레벌떡 들어오는 이십 대 초반은, 그다지 서른을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결국 지금을 살아낼 뿐이다. 그러니까, 서른 살의 나는 과거에 상상한 서른 살의 나를 꺼내며 서른 살을 기록하는 셈이다.

그래도 내년의 나는 이렇게 말하겠지. “서른 하나는 진짜 달라.”


당신의.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름이 있다. 송도나 죽도, 중앙동과 명동, 민지나 유진이, 초코와 까미 뭐 그런.. 민지라는 친구가 두 명이 되는 순간 이 민지와 그 민지를 구분하면서 민지들의 본질을 떠올린다. 그리고 민지들과 나의 공통점과 차이점, 장점과 추억을 나누어 본다. 민지야! 동시에 불러도 나는 어떤 민지를 일컫는지 안다. 같은 이름으로 이름 그 이상의 구분을 해내는 위대한 인간이다. 나는 헬렌 켈러와 같은 사람일 필요가, 그 장소들도 구로드웨이와 포라카이일 필요도 없다. 다른 월요일을 맞이하는 것을 알면서도 똑같이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그 모든 것 앞에 이름을 붙여보라. ‘나의’ 혹은 ‘당신의’ 같은. 조금씩 달라진다. 나의 월요일과 당신의 일요일을 이야기하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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