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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깃글 Sep 14. 2021

동물원 이야기(feat. 비둘기)

이제 당신은 비둘기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레드썬.

동물원 주제로 글쓰기,
나는 비둘기를 택했다



어린이대공원으로 들어가는 쪽문이 나왔다. 한강 향해 직진하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린이들의 밝은 웃음과 장난스러운 걸음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모양이 봄 날씨와 잘 어울렸다. 일행과 눈빛을 교환했다. 한번 들어가 볼까? 성큼 그 봄 속으로 들어갔다. 꽃을 지나고, 바람을 지나치고, 풀 내음이 곁을 잠시 맴돌고 사라졌다. 표지판에는 [동물원]이라는 구역이 보였다. 막연한 설렘이 느껴졌다. 얼마만의 동물원인가를 서로 계산하는 대화를 나누자 출입문 같은 곳이 나왔다. 매표소가 따로 없는지 두리번거렸고, 동물원을 무료로 들어가도 되는 것인지 계산하는 어른의 시선이 된 나는 ‘어린이’ 대공원과 어울리지 않았다. 동물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듯 배설물의 냄새가 스멀거렸다. 아이들의 소란스러운 말소리와 그 아이들에게 설명해주는 부모들의 소곤거림이 한 데 섞였다. 캥거루는 아파서 골골대고, 얼룩말은 먼지를 덮고 있고, 알파카는 엉덩이를 보이며 밥을 먹고, 맹수 존에 있는 재규어나 스라소니, 반달곰은 자고 있었다. ‘어머, 저 곰 너무 귀엽게 잔다’ 아주머니 곰은 사람을 찢어요. ‘저기 고릴라 보러 갈까?’ 아저씨 망토원숭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마음대로 부르시면 어떡해요? ‘재규어야 여기 좀 봐!’ 진짜 우리 밖으로 나오면 한 주먹감도 안 되는 애들을 보는 재규어의 심정은 어떨까? 까지 생각에 그치자, 나는 정말 동물원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덩치에 비해 작디작은 공간에서 남은 평생을 살아야 하는, 주는 먹이와 주어진 훈련에 순응해야 하는 동물들의 여생에 대한 슬픈 단상은 일부러 생략하고서.


동물원을 나왔지만 길거리에서 동물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시멘트 웅덩이가 자신의 자리라고 생각하고 편한 자세로 낮잠을 취하는 고양이,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참새들, 산책 나온 푸들, 그리고 저기 또 푸들. 잘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에게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지만, 더 잘 알 수 없는 강아지나 고양이에게는 무조건적인 애정이 생겨난다. 왜 이렇게 예쁘게 생겼어, 쉽게 고백도 한다, 애정표현이나 스킨십은 말할 것도 없고. 그리고 같은 길 위, 같은 시간대 어떤 생명체에게는 공포감을 느낀다. 강아지 고양이보다 더 쉽게 볼 수 있는, 우리의 비둘기 친구들이다. 마치 맹수를 마주친 듯 도망가기도 하고, 자이로드롭을 타는 듯 소리를 지르기도 하며, 가끔 어떤 이들은 먹이를 주며 교감까지 하는데 굳이 동물원을 갈 필요가 없을 정도다.



자식 세 명을 키우며 더 이상의 움직이는 생물은 키울 자신도, 여력도 없던 부모님은 그 흔한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게 한 적이 없었다. 늘 나만 없었던 애완동물(당시에는 이렇게 불렀으니). 호기심 넘치던 초등학교 4학년의 어린이는 2학년 동생 손을 잡고 하교하던 길에, 병아리를 판매하는 할머니에게서 삐약이 두 마리를 샀다. 제일 튼튼해 보이는 녀석들로 배고프지 않게 먹이까지 챙겨서. 얼마 못 갈 거 같다고 믿었던 것인지 엄마는 옥상 창고 근처에 병아리들을 키울 수 있도록 해주었다. 무언가를 책임지고 기르는 행위가 처음이었던 나는 지극정성으로 아기들을 보살폈다. 한 달이 지났고, 조금 더 커진 삐약이들은 나름대로 지독한 똥냄새가 났고, 잘 크고 있는 사인 같아서 뿌듯했다. 닭의 모습을 흉내 내는 듯 살짝살짝 벼슬이 올라왔고, 두 마리는 사이좋게 잘 지냈다. 당시 출장, 비슷하게 몇 달간 떠나 있던 아버지를 위해 치킨을 해드려야지 하는 막연하게 잔인한 생각을 전제로 하며 정성 들여 키웠던 삐약이들은 길고양이들의 위협을 피하지 못했다. 어느 날 한 마리가 사라졌고, 그날따라 저 건물 너머에 고양이 두어 마리가 옥상을 더 자주 쳐다보는 것 같았다. 남은 한 마리는 다른 친구를 찾는 듯 자주 계단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이틀도 되지 않아 나머지 삐약이도 사라졌다.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확실했고, 나는 몇 년간 고양이를 정말이지 미워했다.


키워본 것이라곤 병아리뿐이었기에 나는 막연하게 조류가 좋았다. 그래서 가끔 지나가는 수족관(이름이 수족관인데 새, 파충류, 물고기를 팔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펫 샵 같았던 곳)에서 파는 앵무새, 조금 더 작은 새를 종종 구경했고 삐약이를 그리워했다. 아주아주 어렸을 때는 용두산공원에서 일부러 비둘기들에게 먹이를 준 기억도 있고, 작은 참새는 귀엽기도 하니 새들을 좋아해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여전히 나에게는 삐약이가 마지막으로 키웠던 동물이고, 더 다른 어떤 생명을 키울 자신이 없다. 그 작은 병아리도 지킬 수 없었던 나의 학교 생활. 더 커버리고 더 바빠버린 나는 더 생명을 책임지기 무서워졌다.


탬버린즈 매장 안 진짜같은 말과 한 컷

비둘기로 다시 돌아가 본다. 비둘기는 어느 순간 누군가의 적, 누군가의 스토커, 누군가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회사 동기 중 서너 명이 비둘기에 대한 포비아가 있다. 그들에게는 길거리가 늘 공포영화고, 윈도우 배경화면으로 랜덤으로 새 이미지가 나오면 심장이 멈출 정도로 놀란다. 새 모양의 인형, 형상화된 이모티콘 그 어떤 것도 공포감을 느끼는 것을 보며, 조류 공포증을 겪는 이들을 위해 19세/청불과 같은 경고가 생겨야 하지 않을까 염려한다. 종종 동네에서는 거의 같은 위치에서 같은 비둘기들을 여러 번 마주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저 녀석 분명히 어제 저기서도 먹이(인지 모르겠는 무언가)를 쪼아 먹고 있었는데, 엉킨털과 모자란 발가락을 보아하니 또 출근한 것이 틀림없다. 월급이 꾸준히 들어오듯 먹이가 규칙적으로 공급되는 편의점 앞이나, 음식물쓰레기 버리는 곳으로 오는 너는 비둘기계의 공무원이로구나.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간판 그 사이사이로 잠을 청하러 퇴근하는 모습을 보며 워라밸이 확실하다고 느꼈다.


언제 한 번은 회사 근처에서 비둘기가 자신의 날개를 사용하지 않고 나와 같이 횡단보도를 걸.어.서. 건넌 적 있다. 나는 비둘기 자체를 싫어하지 않는데, 정말 자신이 인간과 동일하게 건널 수 있다고 믿는 바보 같은 단순함이 설명할 수 없이 소름 끼쳤다. 더 이상 날지 않으면 새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금방 죽음에 다다를 것이 뻔한데, 그러한 현실조차 내다보지 못하는 비둘기의 무거움 만큼은 너무 싫었다. 또, 몇 년 전 블라디보스토크의 겨울을 여행했을 때 비둘기들이 눈바람에 너무 추워 열댓 마리가 서로 밀집해 체온으로 의지하는 것을 본 적 있다. 옷 하나 걸치지 않고 영하 17도를 살아낼 수 있는 비둘기만의 대단한 생명력이 존경스러우면서도 안쓰러웠다.



비둘기는 자연 상태에서는 1년에 1-2회의 짝짓기를 하지만, 먹을 것이 없으면 짝짓기를 멈춘다고 한다. 그러니 도시에 사는 비둘기들은 먹고 남는 시간에는 짝짓기를 해 7-8회 한다고 한다. 경제발전과 함께 자연스럽게 비둘기의 개체수도 팽창한 것. 도시에서 인간들이 자주 마주치는 비둘기는 사실 엄밀히 말하면 ‘집비둘기’라고 한다. 국, 국, 꾹꾹 하고 우는 멧비둘기와 비교되어 부르는 말로 보인다. 인간의 집 밖의 거리에서 살고 있는 그들에게 ‘집’이라는 이름이 붙다니, 그 모든 곳을 집처럼 누벼서일까?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우리가 그들의 집에 드나들면서 감히 비둘기를 쫓아내고, 겁을 내고, 심지어 로드킬을 할 때도 있다. 집비둘기뿐만이 아니라 그 모든 동물, 식물에 해당하는 이야기일 테다. 인간이 갑자기 모든 생명들 사이에 끼어들어 선을 그어, 여기가 내 나라 여기가 내 땅, 여기는 내 집 운운하는 그 모든 행위들이 우습게 느껴진다. 인간은 비둘기를 평화라는 상징을 멋대로 심어준 뒤, 올림픽이라는 인위적인 행사에서 비둘기를 길거리에 방사했고, 자연스럽게 번식된 생명력을 다시 인위적으로 거세시키려 한다. 병균을 퍼트린다 등 위생의 이유로 푸드덕하는 비둘기의 날갯짓에 소스라치게 놀라지만, 그들 몸속에 들어간 모든 것은 인간이 가리고 싶어 하는, 피하고 싶어 하는 추잡한 것들의 집합체일 뿐이다. 음식물 쓰레기, 미세먼지, 중금속, 다양한 세균 인간 세상의 솔직한 모습일 뿐이다.



며칠 전 하늘이 투명한 빛을 내뿜고 연둣빛의 잎들이 살랑거리는 봄을 조금이라도 만지고, 느끼고, 숨 쉬려고 이른 아침 한강으로 나섰다. 푸르른 자연의 빛 속에서 밤새 술을 마시고 버려놓은 맥주 캔, 비닐봉지, 나무젓가락과 그 모든 음식의 흔적이 내 눈앞을 흐렸다. 다시 몇 시간 뒤에 비둘기가 찾아와 그 쓰레기들 속에서 먹이를 찾아 헤매는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감히 누가 누구를 더러워할 수 있는지, 인간이 쓰레기를 쓰레기라 부르고 비둘기를 오염의 원인으로 꼽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인지 깊게 고민했다.

비둘기의 고개 움직임은 굉장히 특이해서 아직 과학자들조차 그 기능을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했고, 애니메이션 등으로 구현할 수 없다고도 한다. 우리가 어딘가를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돌려 시야를 넓히듯 고개를 움직이는 것일 수도 있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추진력으로 사용한다는 설도 있다. 이 조그마한 생명과도 잘 지내지 못하는, 잘 알지 못하는 인간이 서로서로 잘 화합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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