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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깃글 Sep 01. 2021

그 무릎

<씨스파라시>, 몸에 대한 칼럼과 장애인 인권 영상을 보고 욕망에 대한 두 번째 글쓰기




나와는 딱 오십 년 차이나는 할머니가 계신다. 첫째 아들의 첫째 딸이라서 누릴 수 있는 적은 나이 차. 실제로 외할머니와는 마흔몇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늘 정정한 모습의 할머니, 외할머니만 기억 속에 가득했는데, 내가 내 삶에 나만 생각하며 살던 십 대 후반, 이십 대를 지나버리고 나니 두 분의 몸에는 참 많은 변화가 있으셨다. 무릎.. 그리고 또 어디셨지? 정확히 어디를 수술하셨다, 어디가 편찮으시다, 이렇게 콕 집어서 서술하지도 못하는 것을 보면 나는 아쉽고 서운한 손녀에 불과하다. 어느 날 엄마가 전화가 와서는 ‘할머니 생신이 음력 7월 14일이랬나? 내가 작년에 머라 하대?’ 가물가물한 상태로 물으셨다. 나는 ‘아 맞겠지. 맞는 것 같다.’ 그 어디에도 기록해두지 않은 할머니 생신 날짜를 어림짐작의 어림짐작으로 마무리했다. 며칠 뒤 엄마의 자책 카톡에서 결말지어졌다. ‘할머니 생신 음력 7월 10일이란다. 맏며느리가 되어서 그것도 모르고..’


7월 14일이나 7월 10일이나 어찌 되었든 서울에 사는 손녀는 고향에 방문하는 제한된 기간에 미리 축하를 드릴수밖에 없다. 생신을 빙자해, 뵙지 않을 수는 없는 명목으로 할머니댁을 갔다. 할머니, 생신 축하드려요. 나와 딱 쉰 살이 차이나는 할머니는 짐작하건대, 그간의 다른 표정보다 더 밝고 더 기쁜 눈코입으로 나를 반기셨다. 그리고 단 둘이서 대화를 이어가기에 생각보다 어색했다. 오십 년의 간격은 생각보다 큰 건가, 약간 머쓱한 나의 두 팔을 긁어댔다. 할머니는, 두 달 정도 공백을 채우려고 손녀의 여기저기를 관찰하셨다. 피부가 많이 새까맣네. 하하 돈 주고 태닝 했어요! 멋지죠? 그래. 이쁘다. 요건 뭐고 문신이가? 네 저 쪼매낳게 문신도 하나 했어요. 왜 이렇게 살이 빠졌노. 아닌데요 요즘 다시 잘 먹어서 찌고 있어요~ 운동해서 또래 친구 누구보다 건강해요 할머니 걱정 마세요. 손녀의 요목조목 지켜보던 할머니는 아픈 당신의 이곳저곳을 만져보다 말씀하셨다. ‘나는 젊을 때 내가 이렇게 아플 줄 몰랐어.’


50년 전 당신의 젊었던 서른 살은 아마 더 열심히 걸었고, 더 열심히 일을 했으리라. 가족을 위해 책임지어야 하는 몫이 있었으리라. 당장 쥐고 있는 체력과 건강한 두 다리는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어떠한 일이든 해내고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다섯 세월을 거쳐, 당신은 손녀에게 자신이 먹는 온갖 약과 영양제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이것은 위장을 위해서 먹는 거고, 이건 이렇게.. 아니 내가 진짜 맛이 가뻐렸다. 기억을 몬해서 이래 적고 있는데도 정신이 없어. 이 약도 먹고, 이건 영양제고, 이건 어디 때문에 먹어야 하고. 이건 그제 타 온 약이고.. 듣고 있는 나조차도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약봉지는, 할머니의 기력을 더 앗아가는 듯했다. 며느리들의 수가 줄어들어도 기어코 지켰던 ‘명절상’은 이번에 정말 없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 누구보다 할머니가 가장 힘듦에도 의무와 역할, 존재 이유 중 하나로 여기던 부분이셨기에 당신께서 느끼는 소회가 남다를 것 같았다. 더 긴 대화를 나누기에 젊고 바쁜 손녀는 어느 정도의 다음 일정을 어필했고, 그 눈치에 할머니는 손녀의 다음 여정을 보채기 바빴다.


언젠가는 베고 잤을 그 무릎, 더 이상 ‘너희 집(부모님이 사시는 본가를 의미)’도 가기 힘들다고 말하는 그 무릎, 몇 번의 수술을 거쳐 장애인 등급을 받은 그 무릎, 번떡거리는 바닥을 보며 철없이 할머니 바닥 청소는 할아버지께서 안 도와주시나요?라고 물었을 때 움찔거리던 그 무릎, 내가 그 장애인 몇 급 나와서 이제 무슨 센터에 신청하면 일주일에 두 번은 바닥 닦아주러 오더라, 고 말하며 씁쓸해하시던 무릎. 나는, 언제쯤이면 그 무릎에 담긴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결국, 칠월 십사일인 줄 알았던 엄마와 나 때문에 생일을 두 번 치른 할머니. 아빠를 통해 용돈을 부쳐드렸고, 그 돈조차 기꺼이 받지 못하시는 무릎은 또 서울에 사는 손녀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술 먹고 자느라 받지 못했던 그 전화. 서른과 여든의 거리. 느지막한 저녁에 부재중 전화를 보고 다시 할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 전화하셨어요. 이 나이가 되도록, 이 생일을 맞이하도록, 손녀한테 이런 용돈을 받는 귀한 경험을 하는 사람은 많이 없다. 할머니는 되려 나에게 축하를 해주셨다. 비몽사몽으로 대화하다 끊은 전화에서 나는, 얼만큼의 삶을 살아 내다 보면, 무겁고 무거운 세월을 받아들이다 보면 손녀에게 고마워하는 전화를 하는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는 삶일 수도 있지 않을까, 슬펐다.


어느 날. 결국은 할머니의 무릎이 세상에 닿일 수 없는 언젠가가 결국은 찾아올 것이다. 할머니는 지금도 당신의 죽음을 입에 달고 사신다. 이제 다 맛이 갔다. 진짜 죽을 때가 되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런 진심의 말씀을 하실 때 나는, 뻔한 말로, 그런 말씀 마세요- 더 사셔야지요- 가 할머니를 위한 말인지 정말 모르겠어서 침묵해버린다. 어쩌면, 사랑해요 라는 말과 포옹이 정답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목이 멘다. 나에게 찾아올 그 어느 날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할머니의 자식들, 할머니의 손자들, 할머니 손자들의 배우자들, 그 무한한 걱정과 고민 중 몇십 분의 일 정도를 맡고 있는 나에게 할머니의 약해진 무릎은 어느 정도의 삶의 비율이 될까. 정말이지 실제로 내세가 있다면, 현재의 나에게 뻗을 수 없는 그 어떠한 다른 차원의 기회가 있다면 나는 과감하게 할머니, 그리고 엄마를 위해 간절하고 간절하게 기도할 것이다. 사회적인 환경에서 어쩔 수 없는 ‘희생’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감사하고 소중한 그들의 온전한 몸을 온전한 정신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하셨기 때문에. 그 행위를 통해 과분하게 받은 사랑으로 나는 더 축복된 신체와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글로써라도

다시 또

사랑한다고

외치고 싶기에.


씨스파라시 보면서 부산 가던 나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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