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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깃글 Aug 27. 2021

나의 작은 대성당 이야기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을 읽고

시선에 대한 두 번째 글(21.06.20)


시간은 무려 십 년 전으로 돌아간다. 무색의 성인, 능력에 비해 거대해져 버린 자유와 선택을 양 손에 쥐고 다시 태어난 스물의 시점으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던 대학과 마음에 들지도 싫지도 않았던 전공으로 묶여 만난 사람들은 그간의 교복 생활과 달랐다. 술, 자유로운 연애, 담배나 그 이상의 것들. 금기에 가까웠던 모든 것이 심리적으로 가능해진 시점은 너무 순식간으로 다가와, 내 몸은 몇 번의 시차적응이 필요했다. 몇 학년 몇 반 몇 번의 나열에 익숙했던 나에게 같은 전공 무리는 적응 그 자체의 대상이었다. 오리엔테이션 시점에 그저 내 옆에 있었기 때문에, 혹은 학번이 바로 내 앞-내 뒤라서, 또 예비대에서 같은 조원으로 묶였기 때문에. 그 모든 이유가 나에게 친구가 될 수 있는 조건으로 다가왔지만 나에게만 보이는 빨간색 실이었는지, 자주 허탕을 쳤다. 친구가, 어떠한 소무리가 되기 위해 고민을 이렇게나 오래한 적은 없었다. 작고 얕은 관계의 실패를 겪으며 마음의 조각은 더 작아졌다. 그 낯섦을 깨기 위한 몇 번의 도끼질에 나자빠진 나는 매일 저녁 한없이 익숙한 고등학교 친구들을 찾았다. 곁눈질로 배웠던 폭탄주를 말고, 술 게임을 하며 말했다. ‘대학교 애들은 이상해, 그치?’


지연된 관계 쌓기는 언제까지 기한을 미룰 수만은 없었고, 서서히 누군가와 어떠한 관계를 이루기 시작했다. 이 무리 저 무리에서 노력하다 자타의적으로 튕겨 나온 친구, 무리에 속하는 것이 크게 상관없던 친구, 친구가 되는 것보다는 남자 한 명을 낚아서 연애하고 싶은 친구, 이 셋과 ‘친구’가 되었다. 나와 하고 싶은 것의 방향이 결이 가장 맞았던 첫 번째 친구와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 시간에 비례하여 더 친해졌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국어국문학과 신입생들에게는 첫 번째 과제가 주어졌다.


- Mission 과에 존재하는 세 가지 학회 중 하나 이상에 소속되어 선배들과 친분을 쌓아라

국어국문학과나 인문대학 근처에 있었던 이들에겐 익숙하지만, 국어국문학 전공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언어 그 자체의 과학성이나 상관관계, 논리를 탐구하는 국어학. 그간 쌓인 모든 역사적 문헌들을 공부하는 고전문학. 고전문학이라고 부르는 모든 작품 이후 세대의 문학을 연구하는 현대문학. 그리고 그 각각의 교수들이 속해있는 학회들이 하나씩 존재했다. 각 학회는 역사가 다양했고, 실제로 무엇을 배우느냐보다 어떤 선배들이 있고 어떤 동기들이 들어가냐가 아이덴티티를 결정했다. 각 학회가 어떤 성격을 지닌 것을 떠나서, 내 시선엔 이렇게 읽혔다. ‘무난하게 국문과 선배들이랑 저녁에 술을 먹고 놀고 친해지기 좋은’ 고전문학회. ‘일명 인싸, 혹은 조금 더 잘 나가는 인기 많은 선배들과 동기들이 들어가 있는’ 배달말(국어학). 보통 주변의 친구들은 고전문학 또는 국어학을 하나 이상씩은 들어갔다. 그리고, ‘술자리보다는 소설 등 글을 쓰며 철학 이야기까지 확장하는 진지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귀성 문학회. 정해진 답이 없이 소설과 글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려고 들어왔던 국문과 이상을 실현시켜줄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함에, 귀성을 들어갔다.


조금 못마땅했던 학생회 언니 오빠들의 눈빛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귀성은 정말 다른 세계였다. 다른 젊은 회장들에 비해 07학번 선배가 회장이었고 04학번 선배도 만났고, 편입해 소설을 쓰고 싶은 선배들도 만났다. 대중적인 무리에 편입되고 싶었던 심리가 지배적이었던 당시 내 마음은 고전문학에 있었지만, 조금씩 이 모임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선배가 제출한 소설을 읽고 토론하고(라고 말했지만 나는 뭔 말을 나누는지 몰라서 가만히 들으며 배우고), 바닷가로 엠티를 가서 롯데 자이언츠 경기도 이야기도 했고, 늦은 밤 강의실에서 모기를 쫓으며 발제라는 것을 해보고(라고 말했지만 거의 선배들의 아이디어 가지치기를 배웠다. 내 인생 이후의 모든 독서토론 발제는 이때의 경험이 시초가 되었다.) 늘 인싸의 무리에 들어가지 않은 것 같다는 불편함과 어른스럽고 배울 점이 많은 선배들 사이에 있어 다행인 양감이 공존한 채로 시간이 지나갔다. 첫여름, 바다를 가기 전인지 후인지 회장 선배가 나와 친구에게 물었다.

- 영도에서 1박 2일로 20대들이 모여 책을 읽고 토론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관심 있니?

어떤 책을 읽었는지, 어떤 이유로 그루핑이 되어 조별이 구성되었는지, 나는 대체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십 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진 망각의 선물은 포장지조차 사라진 상태니까. 하지만, 거기서 만난 한 언니의 깡마른 몸과 그렇지 못한 강인한 모습은 선명하게 기억난다. 무려, 노란색 상의를 입고 반머리를 했던 것 같은 디테일까지(지금 살짝 소름 돋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다음의 스텝은 대학생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 있었다. 직업을 바로 구할 수도 있고, 재수를 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비학생, 학생의 범주에 들지 않는 누군가가 있고 그 누군가는 세상에 많은 소외를 당했을 것이라는 점은 미처, 그 어리고 좁은 머릿속에 방문한 적이 없었다. 언니는 ‘스무 살 이상이면 당연히 어느 학교의 대학생이어야 성립되는’ ‘전공이 뭐예요?’라는 마음속 질문부터 자근자근 깨 주었다.

- 저는 중학교를 자퇴했어요

놀란 눈빛을 숨기지 못했을 것이지만, 개의치 않는 것인지 익숙한 것인지 그 시선들을 못 본 척하고 조근조근 조원들에게 설명해주었다. 교복 치마가 아니라 바지를 입고 싶은데, 치마만 입어야 한다는 교사의 폭력에 가까운 지시에 반기를 들었고, 어찌 되었든 그것이 마음의 씨앗이었는지 자퇴의 씨앗이었는지 소속을 포기하고, 살아왔다는 이야기. 내 시선은 당시 교복 광고의 한 장면처럼 청소년이 버스 카드를 찍었을 때 나오는 ‘학생입니다’ 소리에 멈추어 있었다. 학교에서의 배움은 남들보다 짧았을지 몰라도 책을 많이 읽었고, 다른 시선을 받아오며 견뎌온 사람의 인생에서 나오는 말의 바이브는 전형적인 학생을 거쳐 또 학생을 하고 있는, 내 앞의 또래는 모두 학생이라는 것을 의심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그 어떤 존재를 규정하는 것의 위험성을 빠르게 캐치할 수 있는 눈치를 심어주었다.


비교적 스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나와 나를 둘러싼 무리 외의 속성과 환경을 이해해본 경험은 씨앗이 되어, 적절한 때에 아주 조금씩 자라났다. 한 친구가 자신의 성지향성을 나에게 커밍아웃을 했을 때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밤새 술을 마시고 탄 첫 차에서 취객만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가 많은 이들이 출근하는 모습을 본 것도 빠르게 적응했다. 아니, 서술하다 보니 너무 당연한 것을 읊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의 내 시선에서는 언니의 경험을 들추어 ‘내 시야가 넓어졌어요! 대단하죠?’처럼 말하다 보니, 유아기 걸음마나 어린이의 구구단 외우기와 같은 어린 냄새가 난다. 더 다른 예가 떠오르지도 않는다. 이렇게 시선이란 아마도,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영역을 무너트리며 세상의 일부분을 내재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언니는, 사실 언제 인스타그램 친구가 되어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대만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다가 영국 남성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현재 영국에서 국제부부가 되어 살고 있다. 가끔 올라오는 정성스러운 사진과 글에서 언니의 손재주가 좋았고, 책을 좋아하고, 글을 참 예쁘게 가꾸어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언니의 글을 보면, 언니가 행복한 모습이 반가워서 그리고 나의 시선이 풍부할 수 있게 도와주어 고마워서 더 정성스러운 댓글을 남기게 된다. 그 이후 얼굴 보고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언젠간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바람도 있다. 다른 나라에서 다른 문화권의 사람과 살아가는 사람의 시선을 공유받는다면, 내 안의 씨앗에서 자라난 줄기는 또 꾸물꾸물 키가 클지도 모를 일이니까.


**주의_해당 과 해당 동호회 관련한 분들이 혹시라도 계신다면 추억에 의거해 약간의 과장이 함께한 쓴 글이니 오해 없길 바랍니다. 다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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