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 존 버거 <다른 방식으로 보기> 읽고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 존 버거 <다른 방식으로 보기> 읽고 시선에 대한 글 쓰기(21.06.13)
햇볕이 점차적으로 꺼지고, 눈치채지 못한 순간 가로등이 켜졌다. 야경이라는 무대가 열렸고, 그 어둠 속 존재한 빛은 점이라기보단 선으로 다가왔다. 펼쳐진 빛줄기의 향연. 그 앞에서 수술 전 라섹의 부작용은 빛 번짐이라는 말 자체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때가 기억났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 저자 존 버거는 언어와 시각의 영원한 어긋남에 대해 설파했다. ‘난 구름을 보고 있어’라고 말하는 것의 설득력은 말이 쌓이는 속도보다 더 빨리 무너졌다. 이러한 어긋남은, 실제 인간이 보는 것은 행위 그 자체라기보다 알고 있고 또 믿고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끄덕일 수밖에 만들었다. 일행과 길을 걷다 지나치는 사람에 대해 ‘방금 저 바지 봤어? 이쁘지?’ 또는 ‘지나간 사람 어깨 근육 장난 아니더라’ 혹은 ‘나도 저런 발목 타투하고 싶어!’와 같은 말 건넴은 일방적일 수 있다. 순간적 스침의 시선만으로도 투과되는 프리즘은, 그 쏘아내는 사람의 시신경이 아닌 뇌의 그 어떤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특히나 지금 사로잡혀 있는 것-이를테면 사야 하는 옷, 취미로 하는 운동, 관심 있는 타투-이 바라봄의 원천이 된다. 똑같은 거리를 매일 걷더라도 늘 새로운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이유기도 하다. 삶에 적용해본다면, 매일 같은 루틴의 회사 생활에도 내가 조금 다르게 믿어본다면, 다른 조그마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제와 다른 회사원 A일 수 있다. 예컨대 회사 동료 C와 F가 사내연애 중인 것을 아는 이에게 그들의 자그마한 행동과 사소한 분위기가 한 편의 연애소설로 다가올 것이다. 또, 다음 달에 일어날 인사이동으로 내 팀장이 바뀔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면 팀장의 모든 말은 몸부림으로, 모든 액션은 안타까움으로 보일 테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살 수 없는 현실적 한계에 지쳐있던 이들에게 이 얼마나 흥미로운 발견인가! 가끔은 거짓을 믿음으로 환원하여 소설가처럼 살아보는 것도 꽤나 해볼 만한 도전이다. 이 사람이 어쩌면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 이 보고서는 리포트가 아니라 러브레터인 것 아닐까! 저 식물이 언젠간 살아 움직여서 저 상사를 먹어버릴지도 몰라. 이 삶은 어쩌면 60분 만에 탈출 성공-실패로 가늠되는 방탈출과 같은 엔터테인먼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어릴 적 <트루먼 쇼>를 보고 내 삶도?라고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경험을 느낀 사람들이라면 다시, 거미줄을 걷어내고 그 쇼를 재개장하여도 나쁘지 않다.
이 이야기들은 사실은 내가 나에게 주어진 ‘따분할 수 있었던’ 삶을 사는 방식 중 하나다. 부산이 아닌 서울을 올라온 이후로 처음 높은 빌딩과 깔끔한 회사원들이 바빠 보였던 강남대로를 보았던 그 설렘, 광화문 앞에 서서 마음이 웅장해지고 울컥해지며 대한민국인임을 상기했던 촛불의 온도, 1호선부터 9호선, 신분당선까지 서울 사람이 되었다는 기분이 들 때까지 바라보았던 지하철 노선표까지. 시간이 제한된 여행자의 분주함과 설렘, 감사함을 기억하며 삶은 여행이며, 이 순간 나는 이 길의 여행객이며 내가 밟는 길 모든 곳이 여행지가 되도록 만들어 본다. 그 순간 자주 가던 그 모든 곳은 새로운 시선을 나를 반기고, 아주 약간 더 즐거움의 총량이 늘어나는 기분을 느낀다. 물론, 여행은 일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특별하듯, 이 가치관도 가끔씩 먹힌다. 그래도 꽤 가성비가 높은 시선이다.
체지방 감량을 시작하고는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 거울을 자주 보게 되는데, 나의 변화를 눈의 기억으로 더듬다가 문득 내 실제 모습을 절대 볼 수 없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과학 따위 잊어버린 세상이 되어) 이 거울도 거짓이고, 비치는 그 모든 물체와 인류가 나를 속이기로 작정한다면 진짜 내 모습은 나만 알 수 없게 되는 상상을 해본다. 찡그리고 웃어보고 눈을 굴려보고.. 거울 복제 버전의 나는 꽤 현실적으로 나를 흉내 낸다. 거울 외에 재현할 수 있는 다른 것들도 있긴 하지만 그 역량은 떨어진다. 특히 카메라로 누군가가 나를 촬영해주는 것이 두렵다. 익숙한 내 눈높이와는 다른 시선, 각도, 모양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태껏 거울 속 나에게 공개한 적 없었던 표정과 움직임이 ‘진짜 나’ 일지도 모른다는 배신감 때문이 크다.
이 배신감이 더 커지는 경우가 있는데, SNOW나 B612와 같은 셀카 보정 애플리케이션으로 내 얼굴을 마주할 때다. 턱은 더 뾰족하고, 눈은 더 크고, 피부가 하얗고 깨끗하며, 코가 반듯이 서 있는 나를 연기해야만 한다. 아직 오디션 볼 자격도 없는 초보 배우 지망생일 뿐이어서,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으로도 받아들이기는 힘겹다. 이건 내 모습이 아니야. ‘무슨 소리야, 저게 네 모습 맞아!’ 세뇌하는 친구의 말은 격려보다는 아이의 등을 떠미는 학부모의 채근으로 들린다. 엄마, 전 도저히 못하겠어요. 진짜 나를 찾을 거예요! 기본 카메라를 사용해 주세요. 그럼에도 카메라 각도가 만들어주는 긴 다리의 나는 포기 못하는 것은 엄마에게 비밀이다.
이러한 셀카 보정으로 만들어낸 연극의 정점을 보여주는 공연이 하나 있다. 풍자를 넘어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냈는데, 요즈음 대한민국 20-30대들에게 핫한 콘텐츠의 주역 ‘매드 몬스터(Mad Monster)’다. 매드 몬스터, 친근하게 줄여서 ‘맫몬’은 매우 과도하고 과격하지만, 셀카 보정의 극대화된 모습을 적용해 부캐를 만들어 세계관을 형성했다. 유튜브를 통해 탄생한 이들은 탄이 와 제이호라는 두 명의 한국의 ‘전형적인’ 아이돌 보이그룹으로 아이돌만의 인사, 걸음걸이, 컨셉을 무장해 무대나 인터뷰 등 활동을 펼친다. 맫몬을 보는 사람 모두가 (거짓의 세상임을 알지만) 괄호로 묵음 처리하듯이 콘텐츠를 즐기고 (실제인 것처럼) 팬으로서 반응한다. 세계관 자체를 코미디의 소재로 웃음을 자아내고, 그러한 가상 세계를 다시 활용해 맫몬이 실제 자신들의 본캐인 개그맨들이 본인들을 흉내 낸다며 고소하겠다는 에피소드도 만든다. 이 유니버스에서는 뻔뻔할수록, 더 현실적일수록 앎과 믿음이 강화된다. 유튜브에서만 상황극을 그치지 않고 ‘실제로’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고, ‘실제로’ 음원을 발매하고, ‘실제로’ 음악방송에 등장하여, 그 모든 ‘실제와 같은’ 팬들이 ‘실제로’ 팬이 되어 함께 연극에 참여하는 모양이 되었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보정 기술이 어설퍼서 맫몬의 모습과 실제 모습이 왔다 갔다 비치는데, 팬들이 ‘국내 무대는 처음이라 긴장했다’. ‘KBS 카메라 화질이 좋지 않아서 오빠들 모습이 잘 담기지 않는다’와 같은 열 받는 (진심이 튀어나왔다) 연기를 같이 펼친다. 매트릭스와 같은 그들의 세계. 이쯤 되니 진짜 맫몬 오빠들은 정말 존재하는 분들일지도 몰라…
사실 진짜든 가짜든 결국은 보는 것을 믿냐 안 믿냐로 귀결되는 듯하다.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을 읽고 나서는 더욱더 보는 것을 얼마나 의존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나에게 대성당 같은 존재는 무엇일까, 보았지만 본 것 같지 않은 것, 말로 설명이 되지 않는 것, 보았지만 보았다고 하기에 알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 다시 보아야 하지만 다시 보아도 비슷한 느낌인 것, 그저 물체나 형상으로만 기억에 존재하는 것 말이다. 주인공에게 맹인은 대성당 같은 존재였기에, 그 그림을 그리고 눈을 감고서 믿고 알았던 것을 흐트림으로써 대성당과 맹인의 삶이 함께 그의 시선에 스며들었다. 유럽여행 때 보았던 수많은-역시 잘 기억나지 않는-성당들을 떠올려보면서 그 과정의 대목을 꽤 고귀하게 읽어 내려갔다. 나에게도 수많은 대성당이 존재하는 만큼, 대성당과 맹인을 깊이 마주치지 않는 삶은 어렵지 않게 가능하다. 100년의 물리적 시간이 주어진 삶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피한다면 피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맞닿았고, 어쩌다 보니 피할 수 없었고, 튕겨내지 않고 받아들인다면, 다시 번져나가는 그 시선의 물감은 더 다양한 색을 만들어낼 수 있다. 어떤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지는 이제 붓을 잡은 이에게 달린 셈이다.
다시, 나의 팔레트를 바라본다. 미술시간에 소위 더 잘 살거나 1-3살 위 형제자매가 있는 친구들의 팔레트를 비교했던 그 마음으로 바라본다. 너무 딱딱해 굳어 깨져버렸거나, 너무 물러서 옆의 것과 섞여버린 색도 있다. 그러나 새하얀 도화지 앞에서는 나와 앞으로의 그림만 존재할 뿐이다. 18색이냐 48색이냐도 중요하지만 주어진 색에 충실하여 세상을 칠할 수 있는 색이 무엇일지 고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화려한 스킬로 거리감이나 질감을 표현할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노란색과 파란색을 섞어 여러 가지 초록색을 만든 뒤 필요한 곳에 적절히 칠할 수 있는 사람이려 한다. 대성당을 그리고 보니 막상 세상이 말하는 대성당이 아닐지언정, 그리는 과정 내내 믿었던 대성당의 모양과 방향을 잊지 않는 사람이고도 싶다. 다른 이가 그린 대성당이 나의 것과 다르면 다른 대로 대성당의 범위를 넓혀나가면 된다. 그렇게, 아주 조금씩 내 시선은 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