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혜 <우정도둑>을 읽고 산문으로 대답하기
현재를 바라보고 미래를 앞당기며 살아가는 나에게 C의 청첩장 모임은 새로운 경험을 안겨 주었다. 그래도 내 결혼식에 미수 너 혼밥 먹지 않게 할게. 깜짝 게스트가 있다더니 대학교 졸업 후 한번도 본 적 없던 S가 나타났다. C와 S는 같은 사학과였고 C가 본가 올 때마다 종종 공을 같이 차는 사이라 했다. 사학과 추억 속에는 내 전공보다 친숙한 이름이 많이 등장했다. S와 나는 같은 동아리도 했던 터라, O선배와 P선배, N과 S의 과거 이야기와 L의 근황까지 ‘그때 그 사람들‘이 쏟아졌다. 너네 사학과는 정말 과CC의 향연이었잖아, 그때 그 친구 결혼식은 누가 갔다고? 한 학번을 거의 쓸어버린 타노스 같은 기수도 있었다며 우리는 웃었다.
무수한 잔을 비우며 내가 잊고 있었던 대학생활의 일부분, 그때 친구들, 그때 기억 또 그때만이 주었던 순수한 많은 나와 우리들이 식탁 위에 올라왔다. 그리고 C와 내가 친구가 된 계기를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10대 후반 20대 초반 우정이 전부였던 시절 절친한 친구가 2명 있었는데, 한명은 남자 한명은 여자였다. 그 한 명의 남자아이 B가 나와 같은 대학에 합격한 C를 내게 소개시켜주었다. 너네 둘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니까, 둘도 사이좋게 잘 지낼 것 같아서. B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우리는 꽤 자주 만나고 친해졌다.
어제도 그 B 친구 얘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더이상 친구가 아닌 사이에 무심하게 궁금즘을 꾹 숨기며 물었다. 2년 전 결혼했다는 B를 언급하며, 우리는 왜 다시 친구가 될 수 없는지, 그때 왜 도망갔는지, 대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이유를 상기시킬 필요 조차 없는 나이가 되었다. 서로에게 민망한 사과와 용서를 요구할 이유조차 없는 평온한 호수에 돌멩이를 던질 필요가.
걔 어떻게 지내냐, 너 결혼식에 보겠네, 볼 것 같애. 와이프랑 같이 오려나? 그러지 않겠어?
잃어버린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게 상상이 안 간다. 어쩌면 전애인보다 더 미치도록 이상한 전절친과의 조우. 친구했던 시간보다 더 길어져버린 친구가 아닌 타인으로의 공백. 무심한 인사 한 마디 또는 눈빛만으로 끝날수도 있는 재회. 야 잠깐만 나 갑자기 기억나서 그런데 B의 전화번호 뒷자리 XXXX 맞아? 내 머리속에 그 세 글자와 함께 떠오른 그 번호. 우리는 아직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성심성의껏 열 한자리를 눌러가며 서로에게 문자를 하고 전화를 했다. 군대갔을 때 그에게 편지도 보내고, 소주 한 병 이천 원 하는 싸구려 안주를 파는 술집에서 취하기도 하고, 각자의 이별에 위로해주기도 하고, 사실 남자들은 이런 모습이 있어 하고 강의도 해주었던 B. 남녀 사이에 우정이 있냐고 묻는 질문이 나에겐 무용하기만한 즐거운 우리의 추억들.
야 진짜, 뒷자리 XXXX가 진짜 맞네. 그걸 기억해?
그렇게 잠깐 내 손에 쥐어진 B와의 추억을 나는 내려놓았다. 시간이 훔쳐간 그 우정, 시간이 내 눈을 가려 잊고 있던 B와의 모든 것. 이젠 그것들이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는 넉넉한 내가 있다는 걸 잘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