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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R Jul 17. 2017

내가 경험한 치매에 관하여

치매는 단순히 기억을 잃어버리는 병이 아니다. 한 인격을 '지금껏 살아온 시간의 축적'이라고 이해한다면,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인격이 사라지는 것이다. 또 성격도 달라진다. 감정도 이상해진다. 사람을 때리고 욕하면서 미묘하게 웃는 표정이 나타난다. 이것이 분노인지 재미를 느끼는 기쁨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 상황에서는 이런 감정을 느낄 것이다"라고 예상한다 하더라도,  치매 환자는 우리가 기대한 방식으로 느끼지 않는 것 같다.

치매는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발현되는걸까? 길을 잃고 집을 찾아오지 못한다든지, 가족의 얼굴을 못알아본다든지 하는 것은 정말 양반이다. 심한 말로 '노망났다'고 하는데, 알고 보면 그게 절대 심한 말이 아니다. 우리 할머니로 말할 것 같으면 욕설, 폭행에 최근에는 침뱉기라는 새로운 증세(?)까지 더해졌다. 또 이번 추석에 찾아뵈었더니 호흡기 삽관을 자꾸 제거하려하여 양손이 다 침대에 묶인 신세가 되어 있었다. 전보다 더욱 기력이 쇠잔해져 (욕설을 포함한) 말 자체가 거의 없으시지만, 지금 이 문장을 쓰는 자정까지도 누운 채로 허공에 침을 뱉고 있다.

그러니까 치매는, 한 인간이 평생에 걸쳐 익히고 경험하며 축적해왔던 인간관계, 행동양식, 지식 등을 포괄한 모든 기억을 다 비워가는 병이라고 보면 될까. 그럼 될 것 같다.

작년 추석, 나를 예뻐했던 할머니가 새벽녁까지 허공에 대고 욕설을 퍼붓는 것을 듣고있자니, 아, 우리는 내가 모르는 새에 이별하고 말았구나 싶었다. 정신을 온전히 유지하다가 어느 순간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갑작스러운 이별이라면,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고 마침내 본래의 인격이 숨쉬는 시간이 점점 더 적어지는 치매는 느린 이별이다. 내가 알던 할머니의 인격은, 괴팍했지만 날 끔찍히 예뻐라했던 박 여사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정말로...할머니의 영혼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작년 추석 우리의 이별을 처음 깨달았을 때, 이 질문은 나에게 너무도 심각하고 중요한 것이었다. 그의 영혼은 지금쯤 알지못할 어딘가를 헤매며 울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늙고 지친 몸이 아직 세상에 우리와 함께 있지만은, 영혼이 먼저 떠나 어디선가 평안을 누리고 있을까.

또 한가지 괴로운 질문은, 할머니의 치매는 왜이렇게 주변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나타나느냐는 것이었다.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내 기억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할머니는 그다지 사랑받지 못했고 사랑할줄 몰랐다. 할머니는 따뜻하고 인정많기보다는, 신경질적이고 원망에 차있는 사람으로 기억된다. 엄마가 말해주는 일화에서도 할머니는 자녀들에게 따뜻한 말이나 격려를 해준 적이 없었다. 늘 퉁명스러웠고, 사소한 것에도 심한 면박을 주었다. (그런 분이 나를 한없이 예뻐한 것은 늘 온가족에게 미스테리였다.) 그러니까 오늘날 할머니의 치매가 이렇게 주변사람들에게 폭력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평생에 걸쳐 할머니가 상처받고 고통받았기 때문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할머니의 인생이 불쌍해서 울었다. 그게 아니라면, 치매의 증상은 한 인간이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답게 살았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나타나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의 인생도 너무 부질없어서 또 울었다.  

어느 순간 아주 오래전 읽은 책이 생각났다. 신경전문의 올리버 색스 박사가 쓴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라는 책이다. 박사의 환자 중 한 남자는 인생의 특정 시점 이후로는 단 몇분도 기억하지 못하고 수십년째 모든 기억이 한 시점에 머물러 있었다. 박사는 '인간은 기억의 축적물'이라는 관점에서 그의 삶을 회의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간호사들에게 "그에게도 영혼이 있을까요?"하고 묻게된다. 간호사들은 박사에게 그 환자가 성당에 갈때 동행해볼 것을 권유한다. 성당에서 박사가 몰래 지켜보는 가운데, 그 환자는 혀 위에 성모 마리아의 조각을 얹고 아무도 범접하지 못할 집중력을 발휘하여 몇분간 기도를 했다. 그러니까 그 순간만큼은, 그는 온 몸과 마음으로 거기에 온전하게 존재했을 따름이었다.

물론 우리 할머니에게는 이제 그런 영성을 느낄 순간조차 없다. 작년에 할머니의 머리맡에서 기도하고 싶어서 가까이 다가갔다가 할머니가 휘두르는 주먹에 얼굴을 한대 맞을 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린 결론은, 영혼의 일은 정말 아무도 단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잠든 꿈에서라도 할머니의 영혼은 다시 육신에 깃들지 모른다.

사실 이미 할머니의 영혼이 영영 떠났다 해도, 괜찮다. 이는 우리가 육체의 죽음을 통한 갑작스러운 이별 대신, 점진적인 정신의 죽음을 통한 느린 이별을 마주했다는 뜻일 뿐이다. 한 영혼이 병마를 마주하여 힘겹게 싸우느니, 먼저 점령당한 육체를 떠나 피안의 성에서 편안하게 쉬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또 치매가 평생을 사랑받고 사랑하며 살았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발병하는 것이라 해도, 괜찮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받고 사랑하며 살고싶은 소망이 사라질리 없지 않은가. 나에게 치매가 찾아온다면 할머니가 하지 못한 일 한가지는 반드시 해야지. 주변 사람들에게 당신과 있었던 일들로 인해 내가 어땠는지, 또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영상으로 남겨주고 싶다. 단 가족의 돌봄은 받고 싶지 않고, 타인의 돌봄을 받는 것이 훨씬 낫겠다. 그리고 나의 영혼은 육체보다 한발 먼저 여기를 떠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치매 할머니가 뜻하지 않게 가져다 준 선물이 있었다. 한 2년 전, 할머니가 가족들의 얼굴을 긴가민가 하기 시작했을 무렵의 명절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할머니 앞을 왔다 갔다 할 때마다 할머니는 "이게 누구여, 퇴근하고 현관에서 박OO(어릴때 나의 애칭)~ 박OO~ 하고 부르던 박서방 아니여?" 하는 말을 하루종일 반복했다. 할머니의 말에 나는 순식간에 상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내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어릴 시절, 목동의 낡은 아파트에서 외할머니와 우리 세식구가 함께 살 때일 것이다. 퇴근해서 집에 온 30대의 젊은 아빠는 현관에 서서 신발도 벗기 전에 나를 "박OO~"하고 불렀을테지. 그럼 나는 집안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를 듣고, 후다닥 달려나가 아빠를 반기고 아빠에게 매달렸을 것이다. 그날은 할머니가 그 말을 수십번 반복했기 때문에, 가족들은 몇번이나 웃었다. 나는 할머니의 말을 몇번이나 곱씹고 또 곱씹었다. 치매 할머니의 말이 뜻하지 않게 내 유년의 기억을 가리고 있던 암막을 걷어내고, 달콤한 추억을 꺼내어 보여준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지금은 침대에 묶여있는 할머니의 늙고 지친 몸마저 우리를 영원히 떠나는 날에는, 할머니의 헤어졌던 몸과 영혼이 비로소 서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오면, 이제 할머니의 온전한 몸과 마음 모두가 영원한 평안 속에 들어가셨다고, 내가 또 우리 가족 모두가 진정으로 기뻐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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