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찰 제안서를 작성하거나 브랜드 마케팅을 하고 있다 보면 차별성이 무엇일까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차별성이란 브랜드(혹은 제안)를 선택하는 이유이자 무기이기도 해서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밤낮을 새 가며 아이디어를 발상합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 문득 상품이나 브랜드가 아닌 나의 차별성이란 무엇일까 고민을 품게 됩니다.
차별성.
참 어려운 단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당장 강남역 10번 출구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차별성은커녕 저 스스로 너무 특별함이 없어서 세상의 조연이 된 기분으로 앉아있게 되는데, 회사 자기소개서 하물며 브런치 신청서에서조차 나의 차별성을 요구하니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닙니다.
이에, 결국 차별성이란 뭘까 생각하니 가장 명확한 것은 역시 확고한 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명확한 결과가 능력의 차별성을 나타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태생 조연인 저는 자랑할만한 결과도 딱히 없었습니다. 능력이나 결과조차 특출 나게 뛰어난 게 없다면 인정받는 결과가 나타날 때까지 주인공 병풍이나 해주면서 살아야 하나.
조연을 벗어날 수 없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생각하니 조연의 재밌는 특징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조연은 본인만의 스토리가 없습니다.
인물에게 스토리란 이야기에서 인물들 각각의 개성을 보여주며 무엇보다 이야기에 이 인물이 필요한 가치를 부여합니다.
내가 필요한 가치, 그거야 말로 각자 개인의 차별성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스토리 그거 그냥 대충 지어내는 거 아닌가 싶겠지만 사실 스토리는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갖습니다.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들었던 예시 하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어렸을 때, 창의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바로 연필과 지우개를 하나로 합친 미술가 하이만의 이야기입니다.
"명랑하고 꿈이 많은 하이만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려운 시절을 보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초상화를 그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림을 그릴 때마다 잊어버리는 지우개가 고민이었던 하이만은 지우개를 잃어버리지 않는 방법을 고민하였고, 지우개를 씌운 연필을 발명하여 엄청난 돈을 벌었습니다. “
위의 이야기는 문제를 대수로이 보지 않고 끈기 있게 고민하고 도전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줍니다.
저는 이야기에 큰 감명을 느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위 하이만과 비슷한 발상으로 만든 일체형 책상을 보고 감명이 깨졌습니다.
책상과 의자는 실제로 붙여놓으니, 의자를 움직일 수 없어 매우 불편하고, 사람의 신체 구조를 생각하지 않은 제품이었습니다. 나뿐만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대학생이 그 일체형 책상을 욕했었습니다.
일체형 책상을 만든 사람도 하이만과 같이 독립된 제품 두 가지를 연결한 획기적인 발상이었는데, 하나는 초등학교에서 교훈용으로 알려주는 이야기가 됐고 하나는 불편함의 상징(적어도 대학생에게는) 됐습니다.
이 차이는 무엇일까? 단순히 지우개 달린 연필은 편하고 일체형 책상은 불편해서 그런가.
사실은 지우개 달린 연필도 사용할 때 불편함을 감수해야 합니다. 일단 연필과 합친다면 필연적으로 지우개 크기가 작아질 수밖에 없고, 작다 보니 잘 지워지지도 않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샤프 위에 달린 지우개를 쓰다가 부러지기라도 한다면 이제부터 샤프심은 펜촉 끝에부터 넣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사실 보기에만 그럴듯하지 일체형 의자와 마찬가지로 쓰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불편한 발명품이었더랬죠.
같은 흐름의 발상, 비슷한 결과물, 공유하는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두 발명품을 보고 사람들이 느끼는 인식은 다릅니다. 그 이유를 저는 '스토리텔링'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연필과 지우개는 스토리가 있습니다. 어려운 가정환경의 하이만, 열심히 살다가 약간의 불편함에서 번뜩임을 발휘해 발명한 교훈적인 서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일체형 의자에 그런 서사가 있나? 최소한 저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스토리는 같은 것을 봐도 남들과 다르게 보이게 연출할 수 있습니다. 입사를 위한 자기소개서나 면접에서 말하는 개인의 주관, 나의 경험은 다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경험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고 어떻게 표현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삶이 힘들거나 우울할 때면 모든 에너지를 다 써서 내 삶의 스토리를 부여하고자 노력합니다. 예를 들면 비극의 주인공이 됐다던가, 하늘이 시련을 준다던가, 이 경험을 내가 미래에 멋지게 활용할 방법을 생각한다던가.
저는 삶의 순간순간을 스토리북의 포트폴리오를 쌓는다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경험이 나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서 포트폴리오가 더 알차질까를 생각하면 어느새 세상의 이야기 속에서 저는 가치 있는 등장인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때로는 일련의 경험이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내가 주인공인 드라마 속 사건으로 인식할 바꿀 수 있습니다.
저는 태생 조연이지만 잊히는 조연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왕이면 주연급 조연 정도는 되고 싶습니다. 그렇기에 평범한 상황을 어떻게 바라봐야 그럴듯한 서사로 보일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됩니다. 억지로 발버둥 치다 보면 주연은 못돼도 주연급 조연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갖고서 말입니다.
그러니 이왕 세상의 이야기에 한 인물이 되었다면 어떻게 내 이야기를 차별성 있게 표현할지를 궁리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또 다른 누군가는 강남역을 지나가는 여러분을 과거의 나처럼 주인공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