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미술에 큰 관심이 없었고 보는 눈도 없었기에 개인적으로 미술관을 가본 적은 그때까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피카소 원화전을 보러 간 이유는 미술의 문외한인 저도 알고 있을 정도의 유명인인 피카소 그림 원본을 한 번 정도는 보고 지적 허영심을 느껴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교과서에 프린팅 된 그림과 실제 그림은 박력이 전혀 다르다는 여자친구의 추천 덕분이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미술관을 방문한 후 저는 상념에 젖게 되었습니다.
섬세한 색감과 시간이 지나면서 느껴지는 피카소의 시선 변화 등이 교과서에서는 느끼지 못한 구체적인 현실감을 느끼게 해 줬습니다.
피카소의 그림이나 조각들은 당시 그가 느꼈던 주관을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적나라할 정도로 투명하게 표현하였습니다. 그 속에서 저는 피카소의 시선이 아닌 그 시선에 노출된 그의 뮤즈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관심이 생겼습니다.
피카소의 <꿈> 과 <창문 앞에 앉은 여인>
위 그림은 피카소의 뮤즈 중 하나인 “마리 테레스 월터”의 두 그림입니다. 같은 모델을 대상으로 그린 그림인데 놀라울 정도로 분위기가 다릅니다. <꿈>은 빛나고 매력적입니다.
마치 소중하게 쓰다듬듯 붓칠 되어 당시 모델인 마리의 아름다움과 그를 바라보는 피카소의 시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리는 이 그림의 모델이 된 자신이 자랑스럽고 세상의 주인공이 된 듯 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 <창문 앞에 앉아있는 여인>은 초창기 <꿈>에서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리는 17살에 피카소를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피카소는 당시 유부남이었고 불륜이었지만 그것을 들키지 않고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깊은 관계를 맺었다고 합니다. 정열적인 사랑의 뒤에 결과인 이 그림을 마리는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요. 제가 마리라면 참담하고 슬픈 기분이 들었을 것입니다. 마리의 생애 끝을 생각한다면 저의 기분이 과한 추측은 아닐 것입니다.
일전에 저는 브런치에 나만의 스토리가 나의 차별성을 만든다는 이야기를 작성하였습니다. 나의 스토리가 남들과 차별된다는 것은 같은 상황일지라도 보고, 느끼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의 스토리란 내가 겪어 온 나의 삶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특별하게 해석해 주는 주관적 시각과 그것을 구성하는 정체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타인으로부터 긍정적인 자아상을 형성하고 정체성을 인정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는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내 곁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내가 타인으로부터 정체성을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듯, 타인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나의 시각에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사람의 특성을 못과 망치를 들고 다니는 조각가의 모습과 같다고 느꼈습니다.
타인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시각이라는 못을 언어라는 망치로 내리쳐서 타인의 모습을 더 정교하게 조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은 조각가라면 타인의 모습도 좋은 모습으로 조각해 줄 것입니다.
반면에 내가 들고 있는 못이 모나고 휘두르는 망치가 어긋나 있다면 내 시각과 언어로 조각된 타인의 모습도 미운 모습이 될 것입니다.
자신을 미운 모습으로 조각하는 조각가를 어떤 사람이 좋아할까요?
잠시 피카소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 보겠습니다.
마리 테레스는 피카소의 그림으로부터 “천재의 숨은 뮤즈”라는 누구도 갖지 못할 자극적이고 독보적인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완성된 그림 속의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은 세상의 주인공이 된 듯한 자부심을 느끼게도 해줬을 것입니다.
피카소는 못과 망치가 아닌 그 만의 능력인 그림으로 마리 테레스를 조각해 준 것입니다.
그림 속의 테레스는 그 누구와도 다른 “압도적인 고유성”이 넘쳐났으니 말입니다.
가정이지만 마리 테레스에게는 피카소의 뮤즈라는 것 외의 다른 정체성은 필요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한 사람의 시각으로 조각된 정체성은 근간이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각한 사람이 없어진 순간 그 조각은 의미가 없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뮤즈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작품 속 뮤즈는 예술가의 시선에 탄생한 연출된 정체성이며 예술가의 시선에서 벗어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덧없는 백일몽과도 같습니다.
피카소의 강렬한 시선에 조각된 뮤즈는 <창문 앞에 앉아 있는 여인>으로 표현된 정체성을 쉽게 거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시선 외의 타인의 시선에는 안중에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창문 앞의 여인의 시선이 현실이 아닌 마치 과거의 <꿈>을 보고 있는 것 같이 공허하게 보이는 것은 그 이유 때문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짐작해 봅니다.
나의 정체성은 타인의 인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이 나를 조각해 주지 않는다면 내가 아무리 멋진 조각을 상상해도 민무늬 대리석일 뿐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