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탐정소설도 꽤 즐겨 읽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추리물 마니아와 다르게 저는 “셜록홈즈”처럼 화학실험과 물적증거를 통해 범인을 찾는 탐정보다 “브라운 신부”처럼 인간의 내면과 심리적인 패턴을 통해 추리 하는 스타일이 더 좋았습니다.
왜냐면 범죄의 완벽함, 그 틀을 비집고 들어가는 단서 해석보다는 “인간이 어떤 심리를 갖고 범죄자가 되는 것일까?”에 더 관심이 갔기 때문입니다.
범죄자는 왜 범죄자가 되는 것일까?
단순한 치정범죄, 원한 관계에 의한 범죄가 아닌 묻지마 범죄들은 무슨 심리적 기저로 저지르는 것일까. 그리고 그런 범죄자들의 패턴이 무엇일까라는 의문들이 저를 픽션의 공간으로 이끌었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습니다.
관심은 어느덧 가상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실제 사건들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유명 프로파일러들이 작성한 국내·외 묻지마 사건 수기들을 읽다 보면 '범죄 시그니처(signature)'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범죄 시그니처란 범인의 현장에 남기는 고유한 패턴을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밧줄 매듭법과 같이 직업적 버릇으로 인해 나타날 수도 있지만, 범죄자가 자신이 저지른 범죄임을 표시하기 위해서 남겨두기도 합니다. 상식적으로 다수의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 범죄가 한 범인에 의해서 일어났다는 것이 밝혀지지 않아야 수사 대상에 오를 확률이 적은데도,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표식을 남기는 것입니다.
당시에 저는 그러한 시그니처를 자신은 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과 반복되는 범죄에 매너리즘을 느끼지 않기 위한 스릴의 추구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생각해 보면 개인주의 사회에서 충족 받지 못한 범죄자들의 어긋난 정체성의 표현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단주의에서 벗어나 개인주의로 향해가면서 사람은 집단적인 정체성에서 점점 나의 고유성에 더 주목하고 더 가치를 부여하게 됐습니다. 예전에는 “김씨 일가의 장남”, “OO 지역 이장의 아들”로도 나의 정체성을 인정받고 그것을 만족해하며 살았지만, 개인주의에서 그러한 집단적 정체성의 가치는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지금은 “그 누구로도 대체되지 않는 나”의 정체성(Identity)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자아 표현 직업(이를테면 인플루언서), 나만의 OO로 표현되는 취미(대표적으로 타투), 더 나아가 소비조차 물건의 기능보다 브랜드 메시지(이를테면 환경보호 등)를 보고 구입합니다.
이 모든 것이 개인주의 “개인”인 “다른 사람과는 다른 고유한 나”를 연출한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주의가 강해질수록 남들의 시선에 개의치 말라고 메시지를 설파하지만 자신의 고유성을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은 더욱 강해집니다.
고유성이란 인정받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인기 있는 MBTI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MBTI의 유행이 타인을 쉽게 범주화하고 작은 대화 주제로서 좋기에 인기가 생겼다고 이야기하지만(그것도 물론 맞지만), 저는 그 이상으로 MBTI가 고유한 나를 뚜렷이 해주고(그것이 설령 16가지 밖에 안 돼도) 나와 남들의 차별성을 만들어 주기에 더 인기가 있는 것이 아닐 생각합니다. 실제로, 가끔 혼자서 카페에 갔다가 옆자리 혹은 뒷자리의 사람들이 MBTI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주체가 대부분 “나”인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너, ENTJ야? 어쩐지 철두철미하더라.”가 아니라
“나 ENTJ여서 좀 논리적인 것이 중요해.”라고 말입니다.
상대방과 나를 나누고 나의 고유성을 강화합니다.
어쩌다 같은 유형을 만나면 공감대를 형성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부분적으로 주위로부터 자신의 고유함을 인정받습니다.
그럼, 결과적으로 범죄자가 된 사람들은 어떨까요.
'개인주의의 고양은 폭력을 조장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미셸 비비오르카 저작의 구절이지. 또한 비비오르카는 주체를 빼앗긴 개인이그 불가능성을 뒤집기 위한 폭력 또한 존재할 수 있다고 전개했다.
– 애니메이션 psychopass 中 -
위 대사는 애니메이션 psychopass에서 ’미셸 비비오르카‘라는 교수의 책을 인용하며 나온 대사입니다. 저는 위 대사를 보고 위에서 설명한 범죄 시그니처가 떠올랐습니다.
사실 대중매체에서는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라고 불리는 범죄자들이 매력적이고 지능적이라고 묘사되지만, 실제 국내·외 프로파일링 책들에서 그러한 똑똑하고 매력적인 범죄자는 거의 없다고 설명합니다. 오히려 대부분은 가정에서의 학대, 대인관계의 어려움으로 고립된 삶을 살며 왜곡된 자아관을 갖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설령 유전적으로 지능지수(IQ)가 높더라도 그 지능을 활용하기 어려운 단순 노무 직업에 종사할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변호사까지 된 테드번디가 오히려 희귀 케이스죠).
그들은 자기만의 고유성 즉,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했거나 형성했어도 인정받지 못한 것입니다.
개인주의에서 정체성의 상실은 삶의 주체성을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명백하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저는 그들을 옹호하거나 동정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이 죄를 지은 만큼 합당하고 철저한 사회적 처벌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본질적으로 주장하고 싶은 것은,
개인주의는 '인정받는 정체성을 가지고 주체적 삶'을 살라고 무언의 압박을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범죄자 뿐만이 아니라 개인주의 가치관을 공유한 모든 사회구성원은 이 기준에 미달 될까 불안함을 가지죠.
누구나 삶을주체적으로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내가 듣고 싶은 평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본인이 원하는 이미지로 사회에 소속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큰 문제가 없고 인간으로서 당연한 욕망입니다. 하지만 무서운 것은, 만약 본인이 생각한 자아상과 사회의 평가가 괴리된다면 자신의 가치를 보상받기 위해 타인보다 우월감을 갖는 것으로 보상 받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집단주의에서는 그 집단에 태어난 것으로도 정체성을 가질 수 있으며 집단의 소속감을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은 희미하더라도 이른바, 내가 있어야 할 곳은 항상 보존되어 있죠.하지만,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나만의 정체성 및 차별성을 가지면서도 집단에 문제없이 동화돼야 한다는 이중적인 요구를 합니다. 일명 자소설이라고 불리는 자기소개서도 그 예 중 하나입니다.
반대되는 두 시각에서 교집합을 찾기 위해 우리는 독자적인 나를 구축하기보다 사회적 승자로 평가받는 이미지를 추구합니다.
나만의 정체성을 갖고자 하는 욕구가 우월성으로 변질되게 되는 것입니다.예전에는 경쟁에서 승리한 승리자라는 직관적인 모습으로 나타났지만(개인의 노력을 강조하는 자기계발서 등의 트렌드가 그것) 최근에는 '긍정적 영향력을 설파하고 트렌드를 이끄는 나'라는 더 은밀하고 교묘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에서 벗어난 인정 받지 못하는 소위 비주류는 주체성을 잃어 무가치해지는 자신의 모습과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세상에 적금을 붓듯 분노를 쌓아갑니다.그리고 표출되지 못한 변질된 우월감은 범죄적 정체성으로 사회에 대한 적개심을 표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