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성사 같은 84년생 여자 이야기
요즈음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핫하다. 동명의 소설로도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일명 ‘김지영’은 영화로든 소설로든 많은 사람들에게 감정적 폭풍우를 일으켰다. 비슷한 세대의 여성에게는 ‘내 이야기’ 같다며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20대 젊은 남성들에게는 ‘오버’라고 느낄 수도 있었겠다. ‘82년생 김지영’을 ‘판타지’라 하는 댓글도 보았다. 엄마가 생각난다는 사람도 있었고, ‘82년’이 아니라 ‘72년’ 생이 아니냐는 비아냥도 있었다. 이에 ‘92년생 김지훈’이라는 패러디도 나왔다.
원작인 조남주 작가의 소설은 고 노회찬 의원이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첫 오찬 회동에 선물했던 책이다. 그 의미는 아마도 여성의 삶과 사회적 문제를 환기시키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소설과 영화가 이렇게 많은 이에게 회자되는 이유는 그만큼 다각도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많은 여성들이 고해성사처럼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82년생 김지영’을 증명해 내려는 모습도 생경했다. 이상한 일인지도 몰랐던 지난 시절의 가부장적 모습들을 들춰내고 어르고 서로를 다독이는 광경은 흡사 굿을 한바탕 치르는 모습이다. 아니면 단체로 심리상담을 하는 모습이랄까.
영화 개봉 전후 약 2주간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간증은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공통점이 있고 대략 대한민국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 역시 지난 2주간 마음이 불편하였다. 또 망설였다. 그러나 삶을 돌아보며 이 푸닥거리에 동참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 하나의 기록이, ‘나’라는 여성이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삶으로 ‘개별성’을 획득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빠른) 84년생’ 장녀이다. 그 말은 83년생과 친구 하면서 살았고, 82년생 김지영과는 1년의 사회적 차이가 있다. 나의 아버지는 처음에 나를 낳았을 때는 딸 하나만 낳아 잘 살자고 했었는데 35개월 터울의 남동생이 생겼다. 그래도 우리 부모님은 남녀차별 없이 우리를 길렀다. 나는 체구는 작았지만 공부를 꽤 했고, 선생님들은 나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까지 별다른 차별을 받지 않았던 것 같다. 아! 초등 4학년 때 반장선거에서 반장에 당선됐는데 담임이 내가 여자라고 부반장인 남자아이를 반장으로 바꾼 적이 있었다. 반 아이들이 결사반대해서 원래대로 되돌렸었지만.
여하튼 서울에 있는 남녀 비율이 1:9인 예중 예고에 진학하면서 조금씩 이상함을 느꼈다.(예고라는 특수성이 있음을 미리 밝힌다) 여자애들은 야무졌고 공부도 잘했으며 전공 악기도 잘했다. 한마디로 기개가 드셌다. 남자애들은 처음 입학했을 때 여자애들보다 신체도 작았으며 전공도 잘 따라오지 못했다. 아무래도 여자가 남자보다 신체적 정신적 발달이 빠르니 그럴 수밖에. 고등학교 때는 전세가 역전되었다. 남자애들은 죽순 자라듯 하루가 다르게 키가 컸고 힘이 세졌다. 같은 음악성(능력)을 가진 여자애들은 몇 시간 연습해야 완성이 되는 것들을 남자애들은 힘 또는 (입)김이 좋아 몇 번만 연습해도 되었다. 그러면 여자애들은 그 갭을 메우기 위해 연습시간을 할애해야 했고 무리한 연습으로 손이 망가지곤 했다.(나도 그런 케이스다)
한 전공 선생님은 대놓고 말씀하셨는데,
“어차피 여자애들은 시집이나 가서 악기 안 할 거잖아. 기껏 가르쳐 놓으면. 그러니까 남자애들을 더 신경 쓰고 가르쳐야지”
그럼 악다구니가 생겨 더 연습에 열중하곤 했다. 그래도 전공 1등은 유일한 남자애 차지였다. 우린 모두 의아해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친구는 전공으로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다른 전공으로 재수를 했다. 이럴 때 음악은 참 정직하다.
아 물론 음악도 잘하고 감수성에 힘까지 갖춘 남자들도 있다. 정말 인정할만한. 그들은 실력과 힘에 ‘남자’라는 날개를 달아 더욱 승승장구했다. 나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치열한 입시경쟁에 나의 목표는 사실상 이루지 못했다. 이화여대에 진학했다.(학교가 상징하는 바가 크기에 실명을 언급한다.) 내가 여대라니! 말도 안 돼. 꿈도 꾸지 못한 현실이었다. 뾰족구두에 조그만 백만 들고 다니는 이대생, 나의 이대에 대한 이미지는 아마도 외부에서 보는 시선만큼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대학생활은 행복했다. 뾰족구두에 조그만 명품 백을 들고 다니는 학생도 있었지만 운동화에 과잠바를 입은 학생도 많았다.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벤치에 누워 하늘을 볼 수 있었고, 아무 계단에 철퍼덕 앉아 참치김밥을 먹었다. 화장을 안 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지만 주위 상권이 워낙 좋아 옷 고르는 안목도 높았다. 모두가 의자를 날랐고 책상을 치웠다. 남자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말조심 행동 조심을 하여 성희롱적 발언을 들은 적은 없었다. 오히려 남 교수들이 중창단을 만들어 아이돌 노래 커버를 하는 등 여학생들의 인기를 얻으려 노력했다.
무엇보다 연습을 열심히 해서 시험을 치르면 잘한 만큼 성적을 받았다. 물론 깔아주는 남자 학우들이 없어 교양 점수는 하늘의 별따기였지만 말이다. 대학원에서 교양수업 조교를 할 때 더 크게 느낀 것이 있다면, 이대생들은 웬만하면 착실해서 리포트, 출석, 시험 빠지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점수를 내기 위해서 결점을 찾자면 출석이다. 지각 한두 번으로 A B가 갈린다. 참고로 교환 학점으로 수업을 들었던 연대, 서울대는 학생 반이 출결을 신경 쓰지 않는 듯 오지 않았다. 물론 수업 나름이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노력하면 정당한 점수를 얻을 수 있는 곳이었기에, 정유라 사건 때 아마도 학생들이 의아했던 지점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당연한 일이었고 당연한 세상이었다. 성별로 차별받지 않는 작은 사회였다.
손 부상으로 인해 학교를 그만둔 뒤 진학한 다음 학교는 교육대학원이다. 여기 역시 남녀 성비가 9:1 정도. 3학기 때인가, 같은 남자 동기가 에이뿔, 내가 에이를 받았다. 왜지? 나는 그 남자 동기가 수업에 한번 빠지고, 매주 내는 소논문을 두 번 내지 않은 것을 기억한다. 그때 고등학생 때 높은 점수를 받았던 남자애가 생각났다. 내가 좋아하는 교수님이 왜 그랬을까 계속 생각했다. 역시 남자여서? 그래, 그 친구가 교수님 옆에서 많이 도와드려서 그랬을 거야, 차로 자주 모셔다드려서 고마워서 그랬을 거야. 이런 말도 안 되는 합리화로 조금이나마 스스로에게 위로를 할 수밖에.
사회에서는 안 그랬을까? 내가 연주 활동을 못 하게 된 이후로 이제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했던 것이 바로 ‘글쓰기’였다. 약 1년간 부지런히 썼다. 누가 보든 안 보든 그래, 작가가 되자. 방송작가부터 응모전, 회사, 신춘문예 등 여기저기 이력서를 냈다. 그러다 한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작은 애니 제작 회사에서 2차 면접을 보게 된 것이다. 자소서와 이력서를 정리하고 지금까지 썼던 글을 묶어 면접을 보러 갔다. 약 40분간 대표와 관련 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포트폴리오가 흥미롭네요. 그런데 아쉽게도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함께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결과는 낙방이다. 그 현실적인 문제는 첫째, 음대를 나왔고(관련학과를 졸업하지 않았고) 둘째, 결혼을 했고 셋째, 언제 임신할지 모르기 때문이란다. 첫째는 포트폴리오를 보고 괜찮다 판단했지만 셋째 이유 때문에 안 되겠다 하였다. 그 긴 시간 면접을 보고 허탈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다리가 풀렸다. 하아... 솔직하게 얘기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6년 전 일이다.
이후 나는 나름의 전공을 살려 음악치료사가 되었고, 강의를 하며, 책도 냈다. 이 정도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게 된 건가 싶었다. 더 큰 벽은 아이가 생기면 서다. 고등학교 선배와 결혼하고 7년 차에 우리는 아이를 계획하여 올해 8월에 낳았다. 아차, 그전에 나의 남편 이야기를 해 보자.
나의 남편은 ‘82년생’이다. 김지영 씨와 동갑이다.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공부를 했다. 그는 앞서 이야기한 음악성과 힘을 갖추고 ‘남자’라는 날개를 단 사람이었다.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고 유학도 다녀왔다. 그리고 서른 살에 나와 결혼했다. 결혼 후 7년간 우리는 아이가 없었다. 남편은 아이를 갖고 싶어 하지 않았다. 본인이 한국에서 자리잡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나 역시 남편의 몸과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 갖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 결혼했을 때 우리는 시간강사로 한 달에 각각 27만 원, 36만 원을 벌었다. 부모님의 도움과 내가 이후에 음악치료사로 돈을 벌게 되면서 가계수입은 조금 늘었지만 남편의 자존감은 아래로 떨어졌다. 태어나 1등만 하던 남편이었다. 그러나 역시 3년 차 지나면서 수입은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주머니의 여유가 생기자 마음의 여유도 덩달아 커졌다.
그 사이 나는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원서를 제출한 날 나는 시아버지와 통화를 했다. 박사 원서를 썼다고 하자 시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애나 낳지. 무슨 공부냐.”
상처였다. 누구보다 나를 잘 이해해 줄줄 알았던 이였다. 그는 나와 같은 전공의 다른 학교 교수님이셨다. 시어머니 역시 여전히 직장을 다니시는, 원조 워킹맘이셨기에 아버님께서 공부하는 것에 대해 적어도 반대는 안 하실 것이라 착각한 것이다. 반대하거나 말거나 나는 입시를 봤고, 붙었으며, 박사 붙은 날 병원에서 임신을 확인했다. 우리는 계획하에 아기를 가졌고, 겹경사로 임신 3개월에 드디어 남편이 4대 보험이 되는 직장에 들어갔다. 올해 8월에 아기를 낳아 이제 곧 100일을 앞두고 있다.
나는 친정으로 내려왔고, 다행히 남편 직장도 지방이라 서울보다 훨씬 가깝다. 그는 매일 친정에 들러 아기 목욕을 시키고 밤에 아기와 함께 자다 수유 때 다른 방에서 자는 나를 깨워준다. 내가 몸살이 들어 아기랑 함께 자지 못해서다.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 직장에 간다. 그의 입장에서 그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도 안다. 그런데 항상 미안해한다. 영화 속 김지영의 남편 ‘정대현’처럼.
“다음 학기에 복학해야지.”
“3월부터 일할 수 있으면 해도 돼.”
“늦어서 미안”
“집에만 있어서 어떡하냐.”
“오늘은 못 가 미안해.”
내가 일을 하려면 아이를 맡겨야 하지만 그는 점점 바빠질 것이다. 결국 친정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다. 아이로 인해 엄마는 사회적 네트워크는 뒤엉켰지만, 아빠의 사회는 견고했다. 그가 새벽 수유에 아이 트림을 시키고 아무렇지 않게 말끔한 척 직장에 간다. 그의 직원들은 말한다.
“전생에 나라를 구하셨나 봐요?”
“왜요?”
“애는 엄마가 다 키워주고, 얼마나 편해요.”
그들은 남편이 왕복 2시간 걸려 아이를 보고 가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남편은 일에 지장을 줄까 직장에서 아닌 척, 안 힘든 척한다.
지금도 나는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휴대폰 자판을 열심히 두드린다. 이런 푸닥거리를 왜 하느냐고? 기억하기 위해서다. 연대하기 위해서다. 고등학교 때 전공 선생이 예언처럼 했던 그 말, “여자들은 시집 가버리면 안 하는데 뭐하러 신경 써” 그 말이 맞았던 걸까. 악단의 선배가 “이대는 시집 잘 가려고 하는 데냐?”라고 했던 말. 여자는 일 해야 한다는 시어머니와 내심 집에서 쭉 아이 보길 바라는 시아버지. 아이를 안고 있으면 너무 예쁘지만, 그렇게 칼바람처럼 들었던 말들이 욱신거린다. 정말 그 예언이 맞아떨어질까 겁난다.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런 내가 지금 딸아이를 안고 있다.
‘82년생 김지영’이 판타지라고? 판타지였으면 좋겠다. 며느리 들이자 갑자기 안 하던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이 2014년, 평생 안 하던 김장을 한 것이 2013년, 대학원 진학한다고 하자 애나 낳으라고 한 것이 2018년 겨울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불행,불쑥불쑥 그 판타지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렇다고 시부모님이 나쁜 사람들은 아니다. 나쁘지 않은 사람들도 그들의 삶에선 당연했던 일이었으니까. 92년생 김지훈이 가소롭다. 그러나 김지훈이 정대현 나이가 되었을 때는 좀 달라졌으면 한다. 나도 결혼하고 애 낳기 전까지 김지영이 멀게 느껴졌으니까. 그러니까 김지훈은 죽을 때까지 82년생 김지영의 삶을 ‘판타지’로 여겼으면 한다. 같은 의미로 72년생 누군가도 ‘아직도...’라 하며 82년생 김지영의 삶에 공감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2019년생 내 딸은 지금과는 다른 여성의 삶을 살 수 있을 테니까.
나의 서사는 진행 중이다. 나라는 개인의 서사는 다른 이들의 서사와 만나고 접점을 넓혀가며 사회적, 시대적 여성의 서사가 될 것이다. 여러분의 서사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역사 연구도 국가 및 권력 단위의 연구에서 주요 인물 연구로, 일반 인물 연구로 확장되어가고 있듯이, 나란 개인의 특별한 서사가 우리 공통의 서사, 보편의 서사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록하고 토해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