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치료사의 시선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볼은 한껏 달아올랐다. 11월의 겨울 등산은 우리 몸을 뜨끈하게 만들어 주었다. 다행히 촉촉한 산공기가 지친 우리의 목을 축여준다.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는 동안 길 군데군데 박힌 표지석이 보였다. 오스트리아 국기였다. 우린 조 아저씨를 따라 바하우(Wachau) 지역이 훤히 보인다는 뒤른스테인 성을 향해 오르고 있다.
멜크(Melk)와 크렘스(Krems)까지 도나우 강을 따라 형성된 이 지역은 '바하우 문화경관'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유려하게 흐르는 강과 어우러진 유서깊은 마을이 들어서 있다. 여러 문학가들과 작곡가들에 의해 노래되었던 아름다운 곳이다.
조 아저씨는 자그마한 동양 여자애 두 명이 자신을 잘 따라오는지 종종 살피며 앞서가고 있었다. 아직 눈이 내리지 않은 겨울은 가을의 끝과 맞닿아 있다. 바짝 마른 낙엽이 바스락거린다. 아들과 종종 이 산을 오른다는 그는 우리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다며 휴일도 반납하고 온 것이다.
"저 고개만 넘으면 돼."
멀찍이 앞서가던 조가 헥헥거리며 따르는 우리에게 말했다. 그래, 다 왔다 이거지? 길의 마지막 표지석을 돌아서자마자 이게 웬걸! 파란 하늘이 코앞에 확 펼쳐졌다. 시원한 강바람이 훅 숨으로 들어온다. 타닥타닥 장작을 태우는 겨울 냄새가 난다. 절벽이었다. 우리 발밑으론 아무것도 없었다. 탁 트인 절벽 아래 흐르는 도나우 강을 따라 저 멀리 우리가 머무는 마을, 크램스(Krems)가 보였다. 구부러진 강 사이로 중세 지어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산 너머 이제는 형체만 남은 뒤른스테인 성이 보인다.
"우와 좋다!"
꺄아 소리 지르며 우리는 폴짝폴짝 뛰었다.
"조심! 조심하라고!"
조 아저씨는 두 사고뭉치가 다치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자신이 초대한 아타스트들이 좋은 경험을 하고 가길 바라는 아빠의 마음이랄까. 풍경에 감격해마지않는 우리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조는 슬며시 미소를 보인다. 뺨에 스치는 강바람을 맞으며 숨을 크게 들이쉬어 본다. 좋다. 정말 좋다.
"봐. 깜짝 놀랐지?"
그의 마음이 느껴져서 좋다. 더 좋다.
"조, 아저씨는 좋겠다. 이런 멋진 곳에 살아서."
부러움에 가득 찬 얼굴로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한데 그의 대답은 참 의외다.
"부럽긴, 난 지루한데?"
"왜? 왜왜왜왜왜?
우린 말도 안 된다며 why를 연거푸 외쳤다.
"여긴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100년 전이나 똑같다고. 오히려 한국이 더 재미있지."
"맙소사. 그게 더 좋은 거야. 변하지 않는 것!"
이렇게 대답해 놓고, 한편으로는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 한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로 갖지 않은 것을 동경하는 것, 그래서 우리는 떠나고 돌아오지.
내려오는 길은 오르는 길보다 훨씬 쉬웠다. 조 아저씨는 갑자기 방향을 틀어 길이 없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여기부터는 그냥 굴러서 내려가면 돼!"
낙엽이 가득 쌓여 푹신푹신한 이곳은 때굴때굴 굴러도 다칠 위험이 없었다. 몇백 년쯤 된 나무가 성큼성큼 다가온다. 사소한 말에도 미소가 절로 나온다. 경쾌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래, 이런 사람들과 함께라면 그냥 여기서 살아도 좋겠다. 문득 조 아저씨와 함께 이곳에 자주 온다는, 늘 ‘나의 영웅’이라 부르는 그의 아들이 궁금해졌다.
어느 날. 드디어 작은 펍에서 처음으로 그를 만났다. 이름은 제이콥, 한 눈에 보기에도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제이콥은 음악을 좋아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 노래를 듣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박자를 맞추었다. 제이콥은 순수함을 가진 훌륭한 청중이자 평론가였다. 그가 좋아하면 좋은 음악이었다. 그제야 조가 제이콥을 자신의 영웅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았다. 제이콥은 조의 전부였다. 나는 상상해본다. 산을 내려오는 그 길에서 제이콥은 아마도 천사 같은 얼굴로 낙엽과 함께 데굴데굴 굴러왔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뮤직 디렉터 조는 그 날 공연에서 기타를 연주했던 일본인 아티스트, 유이치를 소개해 주었고, 같은 테이블에서 그의 가족을 만났다. 그의 딸 역시 독특한 모습의 아이였다. 일곱 살 쯤 되었을까? 아이는 아빠의 기타 연주가 꽤 마음에 들었나보다. 연주가 끝나고 아빠가 테이블로 돌아오자 아이는 아빠의 무릎을 타고 올라 목에 매달려 뽀뽀세례를 하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고도 평화로워 보였다.
유이치는 가족과 오스트리아에 정착해 살고 있었다. 이미 오스트리아의 매력에 흠뻑 빠진 나는 궁금했다. 왜 그곳에 사는지 말이다. 그러자 그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했다. 바로 장애가 있는 딸과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일본에서는 아이와 함께 길을 나서기가 두려웠다고 했다. 길에 만난 사람들은 아이를 보고 이상하게 보거나 무례하게 묻기도 했다. 아이가 위축되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그런데 이 곳에서는 남들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삶이 불편하지 않다고 했다. 아무도 이상한 눈으로 자신들을 보지 않는다고.
빈에는 유난히 장애인들이 많이 보였다. 휠체어를 타고 혼자 트램에 오르는 이가 있으면 시간이 걸려도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나야 시간이 많은 여행자일 뿐이지만 여기 사는 사람들은 불편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저 일상인 듯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시선조차 나누지 않고 제 할 일만 하였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이의 표정도 밝았다. 그 어떤 것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장애인 주차장에는 차가 여러 대 있었는데, 모두 비장애인들처럼 스스로 타고 운전하였다.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는 꽤 넓었다. 휠체어든 시각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누구나 함께 탈 정도로 넉넉했다. 시내를 돌아다니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고 그들은 지켜보는 시선도 늘 있었던 일인 듯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따로 도움을 줄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혼자 쇼핑을 하고, 미술관을 들어갔으며, 운전을 한다.
한국에서는 왜 거리에서 장애인을 많이 보지 못했을까. 장애인 비율을 보면 오스트리아나 한국이나 비슷하다. 다만 집 밖을 나오기 주저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며칠 전에 간 새로 지은 대학 건물 화장실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쓸 수 있는 표식이 붙어 있었다. 안에는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넓직한 칸이 있었다. 물론 낮은 높이의 세면대도 있었다. 지은지 얼마 안되어 시설이 참 좋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화장실을 들어가는 유리문이 좁고 무거웠다. 내가 밀고 들어가기에도 무거웠다. 여기에 과연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을까? 혼자서 휠체어를 타고 무거운 이 유리문을 밀어 들어갈 수 있을까?
그들이 대단한 서비스를 바라는 것도 아닐 것이다. 비장애인처럼 혼자서 길을 걷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대중교통을 타고, 화장실에 갈 수 있는 것. 인간적으로 아주 사소하고도 일상적인 일이다. 다들 배탈이 나 급하게 화장실로 뛰어가던 경험이 있지 않은가. 힘들게 장애인 전용 화장실을 찾아왔는데 문을 밀고 들어갈 수 없다면 그 좌절은 어떨까. 그 이후는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그저 구색만 갖춰 놓은 화장실에 장애인 전용 마크는 낯뜨겁다. 나오는 길에 휠체어용 비탈길이 유독 가파르게 느껴진다.
한국에서 그들의 동선을 지켜보면 사뭇 비장애인들과 다르다. 센터와 집을 겨우 오가는데 그마저도 부모나 보호자가 동행해야만 한다. 오스트리아에서는 혼자 다니는 장애인들을 많이 보아왔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 장애는 종류도 다양하고 선천적인 장애 못지않게 후천적 장애를 갖게 된 분들도 많다. 특히 노령인구가 늘면서 장애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 비율이 늘었다. 그러나 지적 능력이 있는 장애인임에도 한국에서 혼자 다니기 쉽지 않다.
게다가 장애라는 기준은 사회의 발전과 성숙도에 따라 기준이 달라질 수도 있다. 과거에는 눈이 나쁘면 치명적인 장애였다. 나처럼 눈이 나쁜 사람은 책도 못 읽고, 일도 할 수 없고, 길도 헤매일 것이 뻔하다. 하지만 현대에는 안경이라는게 있지 않은가. 안경을 쓰면 큰 불편함 없이 일상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 농사짓던 시절에 에너지가 큰 지적 장애인은 동네 바보형 정도로 별문제가 되지 않았었지만, 인구가 밀집된 도시에서는 통제하기 어려운 존재로 여겨진다. 도로가 울퉁불퉁하거나 턱이 많은 도로에서 휠체어는 통행이 불편하지만, 엘리베이터가 잘 갖춰진 건물이나 도로정비가 잘 된 곳에서는 문제도 아니다. 안경처럼 말이다.
나는 잠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우리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다면, 내가 장애 아이의 부모가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게 될까. 나도 유이치 가족처럼 한국을 떠나 살아야 할까. 막막함이 더하다. 제이콥의 행복 가득한 얼굴은 조 아저씨의 헌신과 함께 오스트리아라는 사회의 따스한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애인을 위한 도시의 제반 시설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적정선을 지키는 것,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을 유지할 수 있는 사회. 그것이 그 나라의 미덕이자 조 가족과 유이치 가족이 불편 없이 살 수 있는 이유였다.
한국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살기에 불편하다. 서울이란 도시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모든 것이 발전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들도 평범하게 등산을 하고, 트램을 타고, 여행을 하고, 공연을 보는 삶. 그리고 그 모습이 아무렇지 않는 오스트리아처럼. 서울은 장애가 있더라도 불편함 없이 살 수 있는 도시가 될 수 있을까? 음악치료를 하면서 그때는 못 보았던 세상의 뒷면을 자꾸 보게 된다.
*이 원고를 쓰고나서 Jo Aichinger(1955~2021)의 부고를 듣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만나서 행복했습니다. 당신이 세계 예술계에 많은 공헌을 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것입니다. 소식을 늦게 전해 미안합니다. 하늘에서 행복하소서.
에세이 <마음을 듣고 위로를 연주합니다> 의 연장선에서 음악치료사의 일상과 직업적 생각을 담고 연재합니다. 책이 궁금하시다면 링크를 클릭해 주세요.
http://m.yes24.com/Goods/Detail/117499420